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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현서 Sep 29. 2022

군부 독재 그리고 더러운 전쟁

 중남미 독립전쟁에는 당시 기득권 계층이었던 부유한 토착 출신 백인, 가톨릭 교회 신부 그리고 낮은 계층 출신의 혼혈인 등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지도자, 장교, 병사 등으로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은 국가 상비군이 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중앙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한편 이들은 다시 전통적인 지방 토호 세력인 대농장을 기반으로 하는 토착 군벌(Caudillos)의 저항을 받았다. 이 결과 19세기 중남미 국가들은 국가 전체적으로 쉽게 통합되지 못하고 각각 중앙과 지방의 정치세력들이 정치와 군사적인 충돌을 계속했다. 이러한 역사적 유산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데 종종 중앙 정부의 통치가 산악과 정글 등으로 이루어진 오지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저항을 받고 있다.


 브라질은 종주국인 포르투갈과 심각한 수준의 전쟁이 없이 독립을 했기 때문에 스페인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역내의 다른 국가들과는 다르게 군부의 영향력이 초기에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브라질 군부가 파라과이 전쟁(1864~70)에서 승리한 후 세력을 키워가기 시작하면서 1930년대에는 강력한 정치세력의 등장했다.


 군부는 원칙적으로 민간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하지만 19세기 이후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따라서 군부는 매우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는데 민간 정부를 구성하는 정파들 간에 충돌 발생으로 정치적 혼돈이 조성되면 이를 중재하거나 일시적으로 정권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민간정부가 적절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다고 판단을 하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무력화시키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1830~40년대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에서 군사관학교(military academy)가 설립된 뒤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같은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결과 중남미 군부는 전문화, 엘리트 화의 길을 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에서와 같이 민간 정부가 군부를 완전하게 통제한다는 원칙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는 계속 이어지는 군부 쿠데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소 냉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남미에서는 쿠바 혁명이 성공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좌파세력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중남미 군부는 새롭게 좌파가 준종하는 국내 폭동이나 반란 등을 진압해야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군부는 민간 정부가 경제 사회적 불안을 적절하게 해결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군부 엘리트들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과 그 후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면서 군부 통치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시민들에 대해 일명 '더러운 전쟁(Dirty War)'으로 부리는 심각한 수준의 인권유린을 자행하였다. 군부 정권의 독재와 인권유린에 시민들은 저항을 했으나 냉전시기 중 미국은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국제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군부통치의 인권유린에 대해 묵인을 하였다. 오히려 미국은 군부 정권에 대한 정치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지원을 계속하면서 이들의 통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외채위기로 야기된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이에 따른 경제 불황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냉전 체제가 급하게 종식되자 미국의 중남미에 대한 외교정책 방향은 인권보호와 자유민주주의 정착과 확산으로 수정되었다.


 이 결과 군부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좁아져 개별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민간 정부에 정권을 이양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등 주요 국가 별 사례는 다음과 같다.


 아르헨티나는 1955~73년 기간 중 정치 경제적 혼란을 겪었다. 1955년 좌파 성향의 페론당에 정치적 위협을 느낀 군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 페론당을 불법화하였고 페론당의 근간인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등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후안 페론(Juan Perón)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군부는 1958년 대선에서 페론당의 참여를 불허함으로써 이후 선거를 통해 새롭게 들어선 급진 시민연대의 민선 정권의 정통성을 부여하는데 실패했다.


 1966년 군부가 다시 일으킨 쿠데타도 페론당의 활동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스페인에 망명 중인 페론은 당을 통해 아르헨티나 정치에 계속 영향을 주었다. 군부는 1973년 3월에 실시한 대선에서 페론의 출마를 금지했지만 그의 추종자이자 대리인인 헥토르 캄포라(Héctor Cámpora)가 출마해 승리하고 5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헥토르 캄포라 대통령은 같은 해 6월 페론을 스페인에서 귀국시키고 7월에 대통령 직을 사임하였다. 이어진 10월 대선에서 페론이 승리해 다시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이듬해 7월에 사망하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부인 이사벨(Isabel Perón) 이 대통령을 승계하여 1976년 3월까지 아르헨티나를 통치했다.


 그러나 이사벨 정권은 1976년 3월 비델라(Jorege Videla) 장군이 이끈 쿠데타로 무너지고 아르헨티나는 다시 전례 없는 권위주의적 군부통치시대를 맞이했다.


 비델라 장군은 육군, 해군, 공군을 대표하는 장군들로 구성된 군사평의회(Military Junta)를 구성해 일명 ‘프로세소(Proceso)’로 불리는 ‘국가개조 조치(Process of National)를 실행하며 정치적 혼란을 종식시켜 경제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특히 군부는 좌파세력이 아르헨티나 사회의 혼란과 부패 그리고 전복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들에 대한 숙청을 가혹하게 진행했다. 이 시기에 군부가 사용한 정치적 표어는 가톨릭 교회의 오푸스 데이(Opus Dei)에서 유래한 ‘전통(Tradition), 가족(Family) 그리고 재산(Property)’이었는데 군부의 이러한 입장 표명으로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지지를 받았다.


 군부의 숙청 대상은 좌파 도시게릴라, 정당원, 학생, 노동가, 반체제 전문직 등이었으나 사실은 시민 그 누구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숙청 과정에서 많은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는데 1976~83년 기간 중 약 3만여 명의 행방불명자(disappeared)가 발생했다.


 군부정권의 인권유린 상황은 라울 알폰신(Raúl Alfonsín) 민간정부가 들어선 이후 발표된 인권유린 보고서인 ‘이제 그만(No Más Núnca)’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군부정권은 아르헨티나 경제문제의 원인을 정부의 간섭과 강력한 노조 활동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노조 탄압을 이어갔다. 이 조치들은 아르헨티나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경제는 성장을 멈추었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악순환 속에 실업이 크게 늘어났다.


 결국 비델라 장군은 경제상황 악화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1981년 비올라(Roberto Viola) 장군에게 정권을 이양했는데 그도 다시 이를 갈티에리(Leopoldo Galtieri) 장군에게 넘겨주었다.


 갈티에리 장군은 정치 경제적 난국을 돌파하고 애국심에 기초한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 영국을 상대로 포클랜드(Falklands, Malvinas) 전쟁을 일으켰다. 아르헨티나 군은 영국과 영유권 분쟁 중인 포클랜드 섬의 영국군을 공격해 섬을 점령했으나 영국은 대규모 반격을 감행해 아르헨티나를 패퇴시켰다.


 갈티에리 군부정권은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로 인해 최종적으로 무너지고 1983년에 이어진 대선에서 승리한 급진 시민연합의 알폰신 대통령의 민간정부가  출범하였다.


 브라질의 굴라르 대통령은 1963년 대선에서 발표한 그의 정책이 냉전시기 사회주의 노선으로 비쳐 우익 세력과 군부를 자극하였고 결국 1964년 3월 31일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로서 1946년부터 계속된 제4공화정은 끝이 났고 그는 2003년 좌파 정당인 노동당 출신의 이그나시오 룰라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까지 브라질의 마지막 좌파 대통령으로 간주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브라질 군부는 1964년 4월 1일부터 정권을 장악하고 1985년 1월 15일 민정이양 시까지 21년 동안 5명의 군부 대통령을 세워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군부 쿠데타는 굴라르 대통령의 좌파 성향 정책에 불만을 가진 우파 정치인들이 군부와 공모하여 일으킨 정치적 사건으로 냉전시기에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쿠데타는 당시 브라질 사회의 보수계층을 구성하는 가톨릭 교회, 중상 계층, 반공단체 등 보수적 시민운동 등의 지지도 받았다.


 군부정권은 국가주의, 경제개발, 반공 등을 지침으로 하여 1967년 헌법을 개정하고 권위주의적 통제 시스템을 만들었다. 특히 언론통제와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인권유린을 자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정권의 통치가 자리를 잡은 1970년대는 ‘브라질의 기적(Brazilian Miracle)’의 시기라고 불릴 정도로 경제개발이 왕성하게 추진되었다. 우선 정부가 경제활동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였는데 고속도로, 교량, 철도 등 인프라 건설에 과감한 투자를 하였다.


 또한 국영 전력공사(Electrobras)나 석유공사(Petrobras)를 통해 철강공장, 석유화학공장, 핵발전소 등을 건설했다. 수입 석유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에탄올 산업을 진흥시켰다. 이 결과 1980년에 브라질 총 수출 중 공산품 비중은 57%로 1968년의 20% 대비 크게 증가했다. 국내총생산은 1968년 9.8%이었으며 1973년에는 14%로 매년 고도성장을 유지했다.


 1979년 3월 다섯 번째 군부 대통령으로 취임한 주앙 피게이레두(Joao Figueiredo)는 정치 범죄자들에 대한 사면법을 제정하는 등 브라질의 재민주화정책(Re-democratization Policy)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브라질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군부정권 통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높아졌다. 1984년에는 시위 등 사회적 저항이 다발하였고 특히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는 등 정점에 이르렀다.


 피게레이두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하였다. 이 결과 의회에서 표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이 계속되었다. 1985년 1월 15일 의회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출 표결에서 야당의 탕크레두 네베스(Tancredo Neves)가 당선되고 같은 해 3월 15일 피게이레두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군부정권의 통치는 끝났다.


 브라질의 군부정권은 중남미 다른 국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브라질 군부가 내세운 소위 ‘국가안보 독트린(Doctrine of National Security)’은 국가위기 시에 군부가 국가안위를 위해 봉기할 수 있다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군부가 자행한 인권유린도 모두 이러한 이념적 명분 속에서 이루어졌다. 2014년 브라질 군부는 정권에서 떠난 뒤 30년 만인 2014년에 처음으로 군부정권 시기 중 고문과 살해 등 인권유린이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칠레는 1970년 11월 아옌데(Salvador Allende) 좌파정권이 출범하자 1925년부터 이어져 온 협상과 절충에 의한 정치는 사실상 끝이 나고 좌파연합세력이 주도하는 정치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 시기에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 개혁은 많은 경제 사회적 혼란과 저항을 일으켰다.


 1973년 9월 11일 아옌데 정권은 피노체트 육군 참모총장이 주도하는 쿠데타로 붕괴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같은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피노체트 장군은 쿠데타 초기에 다소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곧바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18년 동안 이은 군부통치를 이끌었다. 이로서 칠레가 그동안 자랑해오던 협상과 절충에 의한 민주주의 정치는 일단 끝나고 피노체트의 권위주의적 군부정치가 시작되었다.


 참고로 1973년 군부 쿠데타에는 미국 중앙정보국이 개입했다는 강력한 논란과 증거가 있다. 또한 칠레 기민당 정치지도자들과 가톨릭 교회도 암묵적으로 지지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군부통치는 좌파 척결이라는 명분으로 강도 높은 인권탄압을 자행했다. 차후에 행해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소 35,000여 명의 인권유린 사례가 신고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고문 28,000여 명, 처형 2,279명, 행방불명 1,248명 등이다. 또한 10만여 명이 인근 국가들이나 북미 그리고 유럽으로 추방되었다. 여기에 수십만 명이 정치적 이유로 직장을 잃었다.


 경제는 당시 시카고 대학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교수의 제자들로 일명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라고 불리는 신자유주의 학파 경제학자들이 피노체트 정권에서 경제운용을 주도하였다. 이 결과 칠레는 이웃 국가들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해 실행하게 되었다.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은 1980년 헌법에 명시된 1988년의 피노체트 군정 8년 연장을 결정하는 국민투표에서 패하고 이어진 1989년 12월 대선에서 좌파 성향의 아일윈(Patricio Aylwin) 민주주의 정당연합(Concertación, Coalition of Parties for Democracy) 후보에 패했다. 이로서 1973년에 시작된 피노체트 군부독재정치는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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