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호 Feb 18. 2023

렌치를 든 아무개 씨가 없다면



새벽에 잠결에 '깨똑~' 소리가 들렸다.

얼핏 눈을 떠보니 밖은 캄캄하였고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이 새벽에?'

핸드폰을 열어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그랬다. 여전히 추운 날씨에 나는 따뜻한 이불속에서 곤한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는 내 아침 밥상을 위하여 새벽잠을 거르바람을 맞으며 어제 주문한 내 물건을 배달한 것이다.


우리는 스폿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에 각광하고 그들을 동경한다. 하지만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은 음지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결코 그들의 노력은 스폿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의 가치에 뒤지지 않는다.


스폿라이트를 받는 사람은 안 봐도 살 수 있지만, 나는 아침밥을 거르고는 수가 없다.




베트남 공장에 근무하던 어느 날, 외부에 저녁모임이 있어서 참석하였다가 밤 11시가 다 되어 회사숙소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공장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장은 주야 2교대근무를 했기 때문에 한창 야간조의 작업이 진행 중인 시간이었다.

그날따라 밤시간인데도 날이 무척 더워 샤워를 마친 내 몸은 이내 땀으로 젖었고, 이마와 등으로 줄기가 흘러내렸다.


현장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저 앞쪽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가보니 공무팀 박 반장님이 현지인 작업자들과 바쁘게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장님, 무슨 일입니까?"

"법인장님, 이 시각에 안 주무시고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또 설비가 고장 났는가 네요?"

"네, 부품 하나가 망가져서 임시로 부품 가공을 해서 고치고 있습니다. "


그랬다. 박 반장님은 야간조도 아닌데 숙소에서 주무시다가 설비가 고장 났다는 연락을 받고 나오셔서, 공무팀 현장직원들을 지도하면서 공작설비로 부품 가공을 하여 설비 수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공무팀 현지인 작업자들 실력이 아직 미흡하여, 한국인 주재원이 일일이 일을 가르치며 작업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거의 육십이 다된 나이에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한밤중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계시는  반장님의 모습이 여간 안쓰럽지가 않았다.


망가진 설비 부품 교체가 끝나고 임팩트 렌치볼트 하나하나를 꽉꽉 조였다. 그러고 나서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윙~' 기계음이 들리며 설비가 돌기 시작하였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 반장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씀하셨다.


"법인장님, 이제 설비가 이상 없이 잘 작동되니 들어가셔서 주무십시오."



그날은 내가 마침 외출을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그 모습을 직접 보게 된 것이지, 실상은 허구한 날 그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내가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편하게 잠을 자는 시간에, 그분들은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볼트를 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박 반장님의 모습을 보고 난 크게 깨달은 게 있었다.


어쩌면 그전까지 나는 20년을 관리업무만 하면서 책상머리에 앉아 상상으로만 그림을 그렸는지도 다.

머릿속에서는 멋진 작품이 그려졌 모르겠, 현실에선 하얀 도화지에 줄 한 줄도 긋지 못하고 는 셈이었다.


현실을 모르는 관리자,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며 뜬구름 잡기에 바쁜 관리자, 머리로 생각하고 입으로는 떠벌리지만 단 하나의 실질적인 실적도 올리지 못하는 허풍쟁이. 그게 내 모습이었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책상머리에 앉아 머릿속으로 아무리 완벽한 그림을 그린다고 한들, 실제로 누군가가 나서서 설비의 ON 스위치를 누르거나 또는 누군가가 고장 난 설비부품을 교체하고 렌치볼트를 조이지 않는 한, 단 하나의 제품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현장을 모르는 관리자는 관리자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훼방꾼이고 걸리적거리는 존재일 뿐이다.




베트남 근무를 마치고 한국 본사에 복귀한 해에 어렵고 복잡한 '회사분할 프로젝트'를 맡아서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그 결과로, 프로젝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회사에 한 푼의 손해도 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무자의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 인사위원회에 불려 가 경고처분을 받았다.


그때 책상머리에 앉아서 탁상공론을 펼쳤던 높으신 분들의 논리는 이랬다.

'내가 완벽하게 설계를 해놓았는데 뭐가 어렵다고 그런 하찮은 실수를 하냐?'


즉, 그 양반들은 자기들이 책상에 앉아서 설계하는 일의 가치를 90%, 현장에서 실제 작업하는 일의 가치를 10% 정도보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 90%도 자기가 한건 아니고 외부 전문가가 만들어 준 것이었고, 10%의 가치라고 하는 일의 실행능력도 없는 위인들이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를 계획하였다고 하는 그들은 상을 받았고, 실제로 프로젝트를 실행한 나는 경고 처분을 받았다.



회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많은 잘나신 분들은 실제로 실무를 하는 실무자들이나 현장에서 작업하는 작업자들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일이 잘되면 다 자기가 잘나서이고, 잘못되면 다 실무자가 잘못해서이다.

자기는 PT 문서하나 제대로 작성할 줄 못하고, 볼트 너트 하나 제대로 조일줄 모르면서 말이다.



새벽에 잠을 걸러가면서 신선식품을 배달하는 분들처럼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회사에서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직원들, 현장 작업자들이 많이 있다. 이들의 노력이 하나하나 쌓여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는 것이지,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의 탁상공론만으로는 어떠한 성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렌치를 든 아무개 씨가 없다면 정말 아무 것도 없다.



최소한 직원들이 피땀 흘려 이뤄낸 성과만을 쪽쪽 빨아먹는 흡혈귀는 되지 않아야 한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참모(參謀)의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