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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Nov 12. 2024

인생,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삶



子日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자왈 군자구저기 소인구저인


공자왈, 군자는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 -논어 위령공편-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타인에게 충고하는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결점은 작은 것도 크게 잘 보이지만, 나의 결점은 큰 것도 잘 보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끔 집 앞 하천변에 산책을 나가는데, 다리밑에 보면 어르신들이 모여 바둑이나 장기를 두며 소일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구경꾼들이 있기 마련인데 가만히 보면 훈수를 두고 싶어 입이 달막달막 합니다. 아무리 하수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두는 걸 보면 잘못된 게 눈에 보입니다. 정작 자신이 둘 때는 형편없는 수를 두면서 말이죠. 때로는 훈수를 잘못 둬서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남을 지적하는 일,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공자가 말합니다. '군자는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라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 군자는 그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으려 하지만 소인 원인을 외부로 돌리려 한다는 말입니다. 부부의 자리에 서면 배우자를 탓하고, 부모의 자리에 서면 자식 탓을 합니다. 형제의 자리에 서면 형제자매를 탓합니다. 사장은 직원을 탓하고 직원은 사장을 탓합니다. 운전석에 앉으면 보행자를 탓하고, 보행자의 위치에 서면 운전자를 탓합니다. 남 탓을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의 탓만 하고 있으면 그게 바로잡아질까요?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남의 탓만 하고 있으면 내 형편이 나아질까요? 그렇습니다. 전혀 바뀌는 게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타인을 책망하거나 원망할수록 나의 발전은 멀어져 갑니다.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점점 뒤처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바로 나요, 래의 나를 만드는 것도 바로 나.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다면 누구 때문일까요? 반대로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 또한 누구 때문일까요? 인생 후반기에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앞으로 만들어질 나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은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어떤 것에 핑계를 대는 건 쉬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풀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만듭니다. 오늘 핑계와 원망을 기준으로 일을 다면, 내일의 나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핑계와 원망을 기준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내일의 발전된 나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핑계와 원망을 입에 달고 산다면 십 년이 지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도 여전히 핑계와 원망을 늘어놓고 있을 것입니다. 먼저 스스로를 탓하고 돌아보지 않으면 절대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子曰 觚不觚 觚哉

자왈 고불고 고재 고재


공자왈, 고가 고가 아니면 고이겠는가, 고이겠는가. -논어 옹야편-


'(觚)'중국 주나라의 술잔을 말한다고 합니다. 술잔 모양을 술 마시기 불편하게 만들 목적으로 원형이 아닌 모나게 사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절주를 위해 만든 이 고라는 술잔으로도 주를 하지 한다면, 절주를 위한 술잔이라고 할  있을까요? 혹은 술 마시기 편하게 술잔에 각을 없애 둥글게 만들어 사용한다면,  잔에 고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고대인들도 술을 마심에 있어 절주가 무척이나 어려웠나 봅니다. 얼마나 술 조절이 어려웠으면 술잔을 각지게 만들어 물리적으로라도 불편하게 했을까 싶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삶

어디 술뿐이겠습니까? 부모님, 선생님, 직장선배께 들었던 가르침, 책에서 얻은 교훈과 각오, 삶을 살며 스스로 세운 원칙 등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원칙은 대체로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원칙으로 정해 놓지도 않았겠죠. 술을 먹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절제를 하라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세운 원칙이지만 그걸 번번이 무너뜨리고 맙니다.


평범함을 지키는 삶

인생 후반기를 살면서 뛰어남보다는 평범함이 행복에 더 가깝다는 걸 느낍니다. 그냥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고, 비난받거나 억울하지 않고, 가난하지 않게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는 만큼이나 평범함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거 같습니다. 비싼 승용차를 타지 않아도, 명품 옷을 걸치지 않아도, 일류 셰프가 요리해 주는 요리를 먹지 못해도 좋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삶이 더 편하고 행복하니까요. 그걸 지키려고 합니다.


최고의 부자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특별한 사람일수록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는 삶, 평범함을 지켜 나가는 삶에서 아름다운 인생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子日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자왈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공자왈,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논어 옹야편-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요산요수의 출처가 바로 논어입니다.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동적이며 즐겁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정적이며 오래 삽니다. 지자는 책과 배움을 가까이하여 지식이나 지혜가 많은 사람, 인자는 사람을 사랑하고 포용하며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물은 활동적으로  없이 움직이는 특징을, 산은 움직임은 없으나 많은 것을 포용하며 고요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생 전반은 지자로, 인생 후반은 인자로.

퇴직하기 전 직장생활을 할 때 회사 내에서 얼리어답터 역할을 많이 하였습니다. 신문물이 출현하면 남들보다 먼저 써보고 그 경험을 동료들에게 공유하는 걸 즐겼습니다. 일도 뭔가 새로운 일이나 프로젝트가 있으면 자진해서 지원하였습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덕분인지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갔습니다. 옳고 그름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머리로 일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 본심은 그게 아니지만 잘난 체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퇴직하고 인생 후반기를 살면서 생각해 보니 이제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들보다 잘나고 똑똑하다고 내세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오히려 외면이나 받지요. 그리고 사실 매일 신문물과 지식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요즘 세상에 젊은이들을 따라갈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조금 더 남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아보기로요. 최소한 속 좁은 사람, 꽉 막힌 사람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으면서 말이죠.


우리 모두 인생 전반을 지자의 방식으로 바쁘게 살아왔다면, 이제 인생 후반은 인자의 삶을 기반으로 여유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요.




※ 이 글은 최종엽著, '오십에 읽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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