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호 Nov 19. 2024

에필로그, 삶과 죽음에 대하여



형제 중에 제일 건강했던 셋째 형님을 갑자기 잃고 나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고전을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글로 옮겼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의 평정심을 조금씩 찾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이번에는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구십오 세로 건강하게 잘 지내시다 쓰러지시고 딱 열흘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게 언제 어디서건 말이죠.


장례 치를 때 영안실에 가보니, '세상에 올 때는 순서대로 와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딱 맞더군요. 생년월일이 적힌 이름표를 보니 구십 대부터 삼십 대까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장례지도사분이 십 대도 적지 않다고 하더군요. 질병, 사고, 자살 등 그 원인도 다양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날 화장장에서 기다리며 보니 아주 젊은 분이 환하게 웃는 영정사진이 걸린 곳도 있었습니다.


장인어른 빈소에 인연이 있는 절의 주지스님께서 오셔서 극락왕생을 빌어주셨습니다. 스님께서 나눠 주신 '영가전에'라는 법문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인연따라 모인것은 인연따라 흩어지니 태어남도 인연이요 돌아감도 인연인걸 그무엇을 애착하고 그무엇을 슬퍼하랴


그렇습니다. 생명은 유한한 것. 누구나 이 세상에 왔다가 갑니다. 모두들 무병장수를 원하지만, 길게 살았다고 잘 산 삶일까요? 짧게 살았다고 불행한 삶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영겁의 세월 중에 이 세상에 왔다가는 건 정말 티끌 같은 시간인데, 길어봐야 얼마나 길고, 짧아봐야 얼마나 짧은 걸까요?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따라 가는 것. 자연의 법칙대로 왔다가는 것인데 애통해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닌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몸뚱이를 가진자는 그림자가 따르듯이 일생동안 살다보면 죄없다고 말못하리 죄의실체 본래없어 마음따라 생기나니 마음씀이 없어질때 죄업역시 사라지네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욕심을 차리기 위해 남을 해합니다. 어찌 보면 하루하루를 산다는 게 죄를 쌓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오래 면 오래 살수록 더 많은 죄를 쌓게 되는지도요. 그러나 죄의 실체가 본래 없고 마음 따라 생기는 것이라, 마음씀이 없어짐과 함께 죄업 역시 사라진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지 모르겠습니다. 무거운 죄의 짊까지 짊어지가지 않아되니 말입니다.




이 브런치북을 처음 시작할 때, 역경에 나오는 '성성존존(成性存存)'이라는 말로 문을 열었습니다. '성(性)을 이루고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역경에 나오는 말을 다시 인용하고자 합니다.



原始反終故 知死生之說

원시반종고 지사생지설


비롯함에 근원하여서 돌아가서 마치는 고로 죽고 삶의 답을 안다. -역경 계사상전-



삶이란 무엇일까요?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역경에서는 자기가 비롯한 곳으로 돌아가서 마치는 게 죽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말에 '죽는다'는 말을 '돌아간다'고 표현합니다. 귀천(歸天), 즉 '하늘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가는 것이죠. 비롯한 곳에서 와서 비롯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기 '죽고 삶의 답을 안다'에서 '대답 (答)' 대신 '말씀 설(說)'을 씁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데요,  정해진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풀어내는 것, 사람마다 자기만의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삶은 무엇일까요, 나의 죽음은 무엇일까요?' 하고요.


생명에게 육체의 죽음이 필요한 이유

내가 비롯했던 순간을 돌아보면 처음에는 나의 육체없다고 합다. 그러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원소가 모여들어 형성되는 것이죠. 이 때문에 아기는 태어난 후에 한동안은 자기 몸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의식조차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천히 형성됩니다. 이처럼 내가 비롯했던 과정을 돌아보면 나의 육체가 결코 나의 본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는 가죽 주머니에 불과하다고 니다. 사용하다 보면 낡고 모양도 변하게 됩니다. 청춘시절 탄력 있고 윤이 나던 피부가 점점 거칠어지고 주름이 지고 일그러집니다. 검버섯이 핍니다. 배가 나오고 등이 굽고 손발이 가늘어집니다. 육체가 시들면서 내가 보기에도 보기 싫어집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육체는 썩어 없어지면 그만인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생명에게 죽음이 필요한 이유, 가죽 주머니일 뿐인 육체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육체는 나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아닙니다. 내가 먼저 비롯하고 나서 그 이후에 원소가 모여들어 형성한 것이 육체이니, 이제 다시 원소가 어진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님이 돌아가셨지만 내 가슴속에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어렸을 때 함께 놀던 기억, 크면서 든든한 후원자로 때로는 친구처럼 지내왔던 형, 형의 영향력은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장인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와 사귀고 처음 인사드리러 갔을 때 인자하게 맞아주시던 모습, 단정하게 앉아 붓글씨를 쓰시던 모습, 나이 들어서도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고 꼿꼿하게 지내시던 모습 등. 여전히 눈앞에 선합니다. 형님이나 장인어른 모두 언제까지나 내 가슴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비록 육체는 한 줌 재로 스러져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만 그 사람이 남긴 영향력은 사람의 기억을 넘어 이 세상에 남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이 세상을 자라게 합니다. 이러한 영혼의 성취가 쌓이고 쌓여 지금까지의 세상이 진화해 온 것입니다. 이를 옛사람들은 '귀장(歸藏)'이라고 하였습니다. 귀장이란 '돌아가서 저장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영혼이 기울인 노력이 돌아가서 저장되고 이 세상에 더해짐으로써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내가 죽는 것이 아님을 느끼며 살았고, 그에 따라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는 것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것이 삶의 의의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성성존존(成性存存). 성을 이루고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한다.


브런치북을 시작할 때 처음 언급했던 말입니다. '존존(存存)',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한다.' 나에게 있어서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나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내가 남겨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앞으로 남은 생의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브런치북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이 글은 강기진著, '오십에 읽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