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간 지속된 야근으로 넋이 나간 내가 뱉은 말에 남편이 응수했다. 고마웠다. 물론 제주에 오기 전 1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둔다고 임신 3개월인 부인에게 말한 그였기에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거다. 내년 3월을 디데이로 잡고 주어진 급한 일만 마무리하고 므찌게 퇴직하기로 했다.
퇴직하고 무엇을 할까 생각하니 괜스레 설레었다. 하고 싶던 책을 실컷 읽고 딸아이와 흠뻑 시간을 보내고, 출판사와 서점 일도 본격적으로 추진해보자 남편과 작당을 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졌다.
그녀와의 전화통화 전까지는.
토요일 하루 종일 시험 진행을 위해 새벽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12시간 동안 1만 5 천보를 3층 건물 안에서 동분서주하며 점심 도시락도 못 먹고 삼다수만 홀짝거리며 일을 마친 저녁이었다. 남편에게 마무리를 하고 곧 퇴근한다고 전화를 하니 남편이 수고했다며 걱정스럽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남편의 전화 너머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회사 그만둘지도 모른다며?! 안돼! 요즘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야. 그냥 다녀! 사업은 위험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유튜브를 많이 봐서 그런 건가? 아니면 9살 꼬맹이가 벌써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건가? 그녀의 진짜 의도는 모르겠으나 웃음이 나왔다. 이건 무슨 친정엄마나 할 소리를 딸내미가 하니 서운하기는커녕 힘들다고 응석 부리는 사회 초년병에게 직장상사가 호되게 현실을 알려주는 띵언 같았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불안정한 시대. 내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대책도 없이 그만두는 지금의 나는 초등학교 2학년생이 보기에도 무모한 도전 같았겠지. 남편이야 원체 고등학교 자퇴, 10년 회사 퇴사 등 나름 그런 결단을 잘해온 사람이라 나의 결정을 쉽게 받아들였겠지만 말이다.
정신이 번뜻 들었다. 20대 시절 공무원이 되기 위해 치질을 불사하고트레이닝복 3세트를 돌려가며 입고 노량진 학원가를 2여 년간 누비던 20대의 불안정한 이희선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꿈꾸지 않았던가?
남편은 아직도 원래 퇴사는 무모하게 해야 한다고 했지만, 오늘 다시 한번 딸아이에게 남편이 넌지시 물었고 빼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