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말고 고모]
일찍 퇴근하는 4단계 3요건
조용히 가방을 싸서 나온다. (안 들키면 그대로 퇴근 성공)
누구에게 들키면 가족이 모두 여행을 가서 일찍 가야 된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대로 보내주면 퇴근 성공)
어디 가냐고 누군가 의심스럽게 물으면 제주도에 가려고 모두 공항에서 기다린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 (믿고 보내주면 퇴근 성공)
못 미더워하면 승현이에게 전화를 걸어 바꿔준다. 승현이가 우리 가족 모두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고모 빨리 보내달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요건 1. 가방을 챙겨 나오는 것도 주변에서는 잘 모를 만큼의 민첩함
요건 2. 제주도에 가야 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담대함
요건 3. 승현이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
고모는 이 3가지 요건을 갖추고 4개의 단계를 밟아나가면 가뿐하게 조기 퇴근이 가능하다.
승현이가 나에게 알려준 비법이다. 자기를 믿고, 상대방이 의심하면 자기에게 전화를 걸어 바꿔주라고 신신당부하며 잔소리를 해댔다. 그것도 전화로 말이다...
언제 와? 빨리 와~의 진화된 버전이랄까....
승현이는 언제부턴가 빨리 오라는 막연한 요청보다는 고모가 자기의 곁으로 빨리 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었다. 물론 그것이 실현 가능한 것이건 아니건 간에 제 딴에는 무척 심혈을 기울여 고안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가서 2020년 2월 현재 앞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나름의 단계로 세분화되었다.
“사장님이 안 믿으면 어떡해.”
“고모, 걱정하지 마. 그럼 나한테 전화를 해. 내가 제주도 가야 된다고 말해줄게.”
전화기를 통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사뭇 진지함과 허세가 함께 어우러져 거스를 수 없는 오라(aura)를 뿜어댔다.
‘정말 말해볼까?’
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0.3초간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왜 일찍 가야 하는 거지?
이런 근본적인 의문이 들 때쯤에는 이미 승현이와 깔깔대며 통화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알았어. 말해보도록 노력해볼게. 그 대신 고모가 전화하면 빨리 받아서 진짜 제주도 간다고 얘기해 줘야 돼!?”
“알았어. 고모. 전화만 해”
이런 대화로 통화를 마무리 지을 때면 회사에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빨리 사장님께 가서 퇴근한다고 말하라며 부추기는 말을 한마디씩 하곤 한다.
그런데 왜 내가 일찍 가야 하는 것인가?
이 근본적인 의문이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진 않았지만, 하지만 이런 의문이 무슨 소용이랴. 그저 퇴근하는 방법을 전수받는 고모는 그 방법을 능청스럽게 실현하고 빨리 가서 조카님의 눈 앞에 나타나면 된다. 그것이 핵심이다. 조카님께서 하사한 방법이 잘 통했는지, 별 탈은 없었는지 하는 결과보고와 함께 말이다. 결과보고를 위해서라도 나는 오늘도 퇴근하는 발걸음을 재촉할 것이고, 회사에서 내 주변에 앉은 분들은 한 번씩은 웃을 테니 왜 일찍 퇴근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아빠, 언제 와? 빨리 와
승현이만 했을 때 나도 매일 비슷한 시간에 아빠 회사로 전화를 걸어 무턱대로 저렇게 물어보았다. 그럴 때면 아빠는 항상 웃는 목소리로 “빨리 끝내고 갈게”라고 얘기하셨다. 승현이가 나의 회사생활에 대해 모르듯이 나도 아빠의 매일매일이 어떠한 일들로 채워지는지 알 수 없었고, 가끔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도 승현이 나이 때의 나도 승현이처럼 내 곁에 없을 때의 아빠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그냥 아빠가 빨리 내 눈앞에 나타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아빠가 돌아와서 나랑 신나게 놀아주지 않더라도 그냥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랐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아빠의 퇴근을 재촉하는 나의 전화 한 통이 아빠의 일상에서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지도 몰랐다.
내가 아빠의 나이가 되고 보니 오색찬란했던 주변의 많은 풍경들은 퇴색하고, 살아내는 것에 급급한 하루살이가 되어 있었다. 아마 내 전화를 받던 그날의 아빠도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힘겨워하셨으리라.
매일매일 출근과 동시에 퇴근을 꿈꾸고 문득문득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곱씹는 일상 속에서 퇴근을 재촉하는 승현이의 진지한 목소리는 나에게 한여름의 레모네이드 같은 느낌을 준다. 시원하고 달콤한데 시큼하고 게다가 톡 쏘기까지 하는 다양한 맛을 지녔지만, 이렇듯 서로 다른 맛들이 한데 어우러져 청량감을 주는 그 레모네이드 말이다. 한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면서 당을 보충해주고 또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레모네이드처럼 승현이의 목소리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승현이 목소리로 만든 마법주스를 마시고 홀린 듯
“빨리 끝내고 가서 승현이랑 놀아야지~”
라는 생각이 저절로 생기게 한다.
나도 아빠의 일상에서 그런 힘을 가진 존재였겠지. 처자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짐에 매일매일 조금씩 어깨는 짓물러가고, 허리는 굽어가는 그런 힘겨움의 연속이었을 아빠의 시간 속에서 나의 목소리가 아마도 아빠의 레모네이드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퇴근을 재촉하는 알람이었을 것이다. 새삼 그것을 느끼고 나니 그 레모네이드 역할을 오랫동안 해드리지 못함에 대한 후회와 죄송함이 밀려왔다. 아빠에게는 삶의 이유였고 또 힘의 원천이었을 텐데 나는 그런 타이틀에 어울리는 다정다감한 딸이 되지 못했다.
지금 혹은 앞으로 내가 누구의 퇴근을 재촉하는 알람 같은 존재가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승현이에게는 오랫동안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빠에게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후회의 마음까지 담아 일찍 퇴근하는 방법에 더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겠다. 나의 퇴근을 걱정해주고 해결책까지 마련해주는 승현이의 마음과 노력을 배신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나의 목소리를 매일같이 기다리던 그날의 아빠에게 지금의 내가 승현이에게 전수받은 ‘일찍 퇴근하는 방법’을 전수해드리고 싶다. 레모네이드 같은 청량감 있는 목소리로 퇴근 알람이 되어드리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승현이가 전수해준 일찍 퇴근하는 4단계 비법을 써먹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