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살리기>
그래,
어릴 때부터 워낙 하고잽이였던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흘려보내는 걸 제일 지루해했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할 게 많은데,
아무것도 안 하기엔, 혹은 똑같은 것만 하기엔
너무 심심하다는 생각을 지겹도록 했던 나였으니까.
그런 나의 성격 탓일까,
도망치듯 사표를 던지고 나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부터
간절히 원했던 그 쉼이 다시 지루함으로 다가왔다.
보고 싶었던 미드 왕좌의 게임은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고,
집에서 늘어지게 낮잠도 자봤고
짧게나마 이미 서울 여행도 다녀왔고,
친구들도 만나 맛있는 걸 먹고 카페도 가고,
며칠 연속을 집 밖으로 안 나가고
집 안에서 방콕 생활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내 삶이
하루 이틀 반복되니 금방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무작정 다 찾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병원에서 다시 일하는 건 생각조차 안 했다.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나온 내 첫 경험이
이미 실패라면 실패인 쓰디쓴 경험이었고,
결국 내가 버티지 못했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다시 도전할 용기가 안 났다.
물론 지금이야 다 그만두고 쉬고 있는 상태니
우울증이 잠잠해진 것 같았지만,
혹여나 나도 모르는 사이 불쑥불쑥 나타나
나를 괴롭히면 어떡하지.
또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게
다른 사람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걸
다시 마주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들이
나를 계속 휘감았고,
그 상황들을 마주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웃기게도 나의 이 다짐은
내가 이런저런 정보들을 수집하고
냉랭한 현실을 마주하고 나니
언제 마음먹었냐는 듯 빠르게 부서졌다.
미국 간호사 쪽도 관심이 있었던 나는
그 정보를 얻기 위해
미국 간호사 에이전시에도 직접 연락해보고,
간호사를 그냥 때려치우고 멀리 떠날 생각도 대비해
캐나다 쪽으로 워킹 홀리데이 정보도 찾아보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경력 쌓을 것을 대비해
구직 사이트에 내 이력서를 작성한 뒤
간호사를 구하는 공고를 하나씩 뒤져보기 시작했다.
내가 잠깐이나마 걱정했던 그 우울증의 잔재들은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내 삶을
다시 원래의 출발점으로 되돌리느냐였다.
어떤 게 지금의 나에게
최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또 내가 다시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내가 후에 얻게 될 결과물을 위한
올바른 발판이 돼 주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며
구직사이트를 뒤져보던 나는
결국 하나의 과감한 선택을 하기로 결심했다.
종합병원의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한 건의 공고.
모집 부서는 내가 다녔던 병동도,
처음에 학생 때 원티드를 했던 중환자실도 아닌,
바로 ‘응급실’이었다.
많은 생각들이 한 번에 스쳐 지나갔다.
내가 과연 응급실에서 잘할 수 있을까.
그 루틴 업무들로 가득 찬 병동에서
내 몫조차 다 해내지 못해
늘 혼이 나고 무시받았던 내가
그 바쁜 응급실에 가서 과연 잘 버텨낼 수 있을까,
내 1인분의 몫이라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그 끝에 다다른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몇 년 뒤에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나도, 그 누구도 모르지만
2년을 채우면 후에 내가 계획을 바꿔
미국 간호사에 도전하더라도
병동보다 더 인정받을 수 있는
특수부서의 경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
혹은 2년의 경력이 필수인
소방공무원 특채 쪽으로의 도전의 기회,
또 혹은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병동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등
지루한 걸 싫어하는 내 성격과
비위가 꽤 강한 나의 장점 등을 고려해 봤을 때에도
다양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이 많은 부서였다.
그래서 모집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본 나는
그날 퇴근한 엄마에게 달려가
5년 전의 내 모습처럼,
다시 대담하게 내뱉었다.
“엄마, 나 응급실에서 일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