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 냄새 주의 글
스무 살, 나에게는 취미가 없었다. 빡빡한 교육과정을 돌파하고 들어온 대학에서는 술부터 가르쳤다. 응원전, 축제, 동아리 등 언제나 술이 있었다. 그렇게 내 취미는 술이 되었다. 술을 마시고 있으면 그 어떤 스트레스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방감에 젖어 나는 2년 간 즐거움에 취해 살았다.
그리고 일 년의 휴학, 이라고 쓰고 금주기간이라고 읽는, 후 돌아온 학교에서 나는 복학생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모두와 친해지는 방법은 술 마시는 것인 것 같았고, 실습이 힘들다는 핑계로 더 마셨다. 졸업 후 간호사가 되어서도 쉬는 날들을 술과 함께 했고, 술로 인해 알게 된 좋은 사람들 덕분에 더 술을 마셨다.
매우 핑계처럼 들릴 수 있지만 동네 탓을 하고 싶다. 술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어디나 그렇다지만, 그래도 특히 내가 살던 동네는 모든 게 술을 마시기 좋았다. 자그마한 갈색과 회색 빌라들 사이에 드문드문 놓여 있는 꽃집, 향수공방, 이자카야는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음에도 SNS에 자주 등장하는 곳들이었다. 그렇게 한데 어우러진 건물들과 분위기가 “넌 아무 걱정도 하지 마, 그냥 한 잔 하고 잊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동네였다. 이사할 당시부터 그 느낌에 취해 놀면서도 ‘돈만 있으면 땅 한 뙈기 사놓고 싶다. 여기는 무조건 뜰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던 2016년.
연남동이었다. 연남동 중에서도 아직 많은 이들이 찾지 않았던 골목 중의 골목. 홍대입구역 3번 출구로 나오면 펼쳐지는 메인 스트리트, 연트럴 파크와는 10분 이상 걸리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은밀하기도, 동네 주민들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친숙하기도, 어쨌든 핫 플레이스와 가깝다는 점에서 안전하기도 했던 동네였다. 또한 알고 보니 가까운 곳에 블로거들이 극찬하는 유명 맛집이 많았다. 고작 집 앞 5분, 뛰면 1분 거리에 다 있었다. 지금은 줄 서서도 못 먹는다는 엄청 유명하고 맛있는 이자카야,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먹는 목화솜 탕수육과 마라탕이 맛있는 홍콩 요리집, 버섯오믈렛과 빠네가 기가 막히는 브런치집과 작지만 딴 세상에 데려다주는 바도 두어 개 있었다.
거의 매일을 다녔다. 나이트 근무만 아니면 맥주 한 잔씩은 꼭 마시고 집에 들어갔다. 학교에 가고 회사에 가듯 술집에 출석했고, 이미 나에게는 술집이 아니었다. 아지트였다. 사람이 적은 평일에는 이자카야에 갔다. 저녁 시간에는 붐볐지만 밤 10시쯤에는 괜찮았다. 안주는 항상 같은 것을 먹었다.
뼈가 아그작아그작 씹혀서 온갖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는 연골 꼬치구이와 알이 오동통한 계절 메뉴인 바삭한 시샤모, 그리고 레몬장에 찍어 먹는 고소한 연어구이. 가끔 특별메뉴로 달걀 노른자를 톡 터뜨려 버무려 먹는 쯔쿠네에 하이볼 한 잔이면, 세상 모든 근심이 날아갔다.
커다란, 아마도 골든 리트리버인 것 같지만 아닐 수도 있는 귀여운 마스코트도 있었다. 남자만 좋아했던 그 아이는 끝내 이사 갈 때까지 만져보지 못했다.
이자카야에 사람이 너무 많은 날에는 맞은편에 있는 바에 갔다. 너무 어두컴컴해서 영업을 하는지 안 하는지도 문 앞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훅- 끼치는 향 내음은 이국적인 저 너머의 도시로 날 데려다주는 것 같았다. 향 종류도 여러 가지였는데, 파주 헤이리의 아프리카 상점에서 본 기억이 있다. 향 연기를 넘어 들어가면, 사장님께서 직접 제작하셨다는 구불구불한 원목 바 테이블이 보였다. 그 위에는 바를 혼자 밝히고 있는 희미한 조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밝기로 그곳을 더 꿈꾸는 것 같은 공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바 테이블 아래쪽에는 상 자리가 있었다. 문자 그대로 상이었다. 손톱으로 긁으면 끼익 하고 인상이 찌푸려질 소리가 날 것 같은, 어렸을 적 할머니 집에서 봤던 은색의 꽃무늬가 그려진 상이 있었다. 친구들과 오면 상 자리에 앉아서 레몬을 넣지 않은 레드락 생맥주에 립 요리를 먹곤 했다.
혼자 가는 날도 많았다. 바 테이블에 앉아 크림치즈, 올리브, 방울토마토를 섞어 맛있었던 안주와 맥주 그리고 이야기를 마셨다. 이브닝이 늦게 끝나도 혹시나 들여다보면 새벽 두 시에도 열려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사장님이 술을 마시는 날이었는데, 유명한 개그맨이나 재미있고 신기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네 시, 다섯 시까지도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지하에 있는 깔끔한 바도 있었다. 처음 이사를 와서부터 궁금했지만 너무 정보가 없어 가지 못했던 곳. 도대체가 홍보를 하지 않아서, 위스키 바라는 것도 이사 오고 6개월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곳에는 싼 지 비싼 지,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해놓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재미있는 사장님이 있었다. 그리고 툭툭 말을 던지는 것 같지만, 술 마시는 내내 물을 열심히 따라주고 이야기를 함께 해주던 정 많은 바텐더가 있었다. 그곳의 존재를 알고 나서는 굉장히 힘들었다. 어디를 가야할지 고민하느라. 바로 위 아래층이었던 두 곳 때문에 내 통장 잔고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점점 아래층 바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그것은 메뉴판 때문이었다. 아래층 바에는 메뉴판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의 기분에 따라 혹은 지금까지 바텐더가 보았던 나의 취향에 따라 위스키, 와인 등을 추천해 주었다. 아무 생각하기 싫은 신규 간호사에게 매우 안성맞춤이었다. 주로 위스키를 마셨고 훗날, 아니 스물여덟까지의 술 입맛을 고급화하는데 꽤 큰 영향을 미쳤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메뉴판이 없었기 때문에 술 이름을 기억하는 게 힘들었다는 것이다. 위스키 이름은 참 복잡해서 몇 번을 들어도 외우기가 어려웠다. 나중에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알아서 내주시는 것이 더 좋았다. 단순하게 위스키를 먹고 싶으면 이곳에 오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내게도 유일하게 기억나는 술이 하나 있다. 제일 좋아했지만, 너무 비싸서 자주 들어오지 않아 그리워했던 술. 나두라. 30cc 한 잔에 2만원이었지만 아깝지 않은 맛이었다. 풀 네임은 검색해서 봐도 항상 잊어버렸었다. 병원에서 나 좀 놔두었으면 좋겠다며 말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곳에 가면 바텐더와 거의 같이 퇴근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번 달은 술을 좀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생각하며 내역에서 술값으로 지출된 것만 계산을 해보니, 안주 값을 제외하고도 81만 원이 나왔다. 음, 어떡하지. 사실 뭘 어떡하겠느냐고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머리보다 몸이 현명했다. 조금씩 술집에 가는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혼자 먹은 술값이 80만 원이 나왔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한 한 언니에게 끌려가 정신과 상담을 받기도 했다. 사실 안 그래도 정신과 상담이 궁금했는데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며 유명하다는 곳에 갔었다. 체크리스트와 상담을 마친 의사가 갸우뚱하며, 너무 다 보더라인(Borderline; 경계선)이어서 본인이 걱정되시면 오라고 말했다. 그 정도로 나는 영악한 간호사였다. 그런 진료비용까지 아무렇지 않게 썼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돈을 참 잘 썼다. 그 때 조금만 아꼈더라면, 이라는 생각은 부질없지만 역시나 가끔씩 하게 되는 생각이다.
2016년의 나는 술값으로 그만큼을 지출한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보다,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번표(스케줄표)가 나오면 일요일, 공휴일에 일하는 지를 확인하고 아쉬워했다. 돈을 더 벌어서 술을 더 마시려고. 그냥 그 때가 생각 없이 즐거웠다. 몸과 마음이 아무리 밖에서 휘둘리고 내달려도, 계단만 내려가면 펼쳐지는 동네가 있었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안아주는 내 집, 내 세상이었다. 모든 곳이 단골이었고 심지어는 편의점마저 단골이 되어 알바생과 노닥거렸던, 약간은 과장 섞어 동네의 인기스타로 일 년을 살았다. 결과적으로 그 술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이사를 결심했지만. 집 앞의 모든 공간들이 완벽했던, 아니 모든 술집이라고 해야 하려나, 아무튼 나를 위로해줬던 내가 사랑한 연남동이었다.
사랑했던 연남동이 지금은 무척 힙 한 동네가 되었다. 한창 사랑할 때도 힙 했지만 더 힙 해졌다. 자주 다니던 조그마한 삼거리는 이제 외국 유명 거리와 견줄 만하게 변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카페와 옷가게가 생겼고, 더 예뻐졌고 멋쟁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슬리퍼 질질 끌고 연골구이만 포장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시시덕거리던 그 때 그 시절이, 나는 가장 그립다.
※ 술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해 짤막하게 소개드립니다. 맛있는 술은 함께 나눠야죠. 위에 소개드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술은 ‘글렌리벳 나두라’에요. 그 중에서도 저는 퍼스트필을 좋아합니다. 마시고 난 후 코끝에 바닐라 향과 함께 진한 여운이 감도는 맛. 위스키를 즐기신다면 꼭 드셔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싱글 몰트 위스키를 좋아하는 편인데, 싱글 몰트 중에 감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술이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