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물설고 낯선 나라 낯선 언어의 무리 속에서 낯선 이름을들으니 정신이 더 혼미해졌었다. 비어 beer라곤 한 젓가락도 들이지 못하였으니 더욱그랬다.
그때 눈치 빠른 지인이 말을 덧붙였다.
진저비어는 맥주가 아니에요.그냥 생강향이 든 음료수예요. 다들 처음에는 "비어 beer"가 든 이 이름에 당황들 해요.
난생 처음 마셔 본 진저비어 맛은 맥주가 든 것도 같고, 안 든 것도 같고, 맛이 톡 쏘는 것도 같고, 안 쏘는 것도 같은, 어정쩡한 중간의 맛이었는데, 그렇다고 밍밍한 맛은 또 아니었으니 속으로 난엄청 당황스러웠었다.낯선 장소에서 불현듯 만난, 내가 잘 모르는 사람같은데, 언니 언니 반가워, 할 때닿는 느낌이 그럴까. 여하튼 그때 난 진저비어가 비어 beer는 아니라는 걸 희미하게 느끼게 됐다.
몇 년 후, 시드니에서 친구와 둘이 마신 진저비어는 비어가 아님을 확신했다. 시드니 강을 따라 운행하는 페리가 내려준 코카투 아일랜드에서 나는 또 그 진저비어와 맞닥 뜨리게 됐다.
친구의 쿨백에서 꺼낸 진저비어는 수십 년 전 죄수들이 갇혀 살았다던 그 섬에서 내 몸속으로칼칼하게 들어왔다.
갈매기 떼가 뿌려놓은 하얗게 쌓인 먼지 같았던 그 누적된 새들의 똥냄새 때문이었을까. 알을 품다 죽은 갈매기들의 시체를 본 이유였을까. 것도 아님 완강한 쇠창살 속 갑갑한 죄수들의 갇힘이 내 몸속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날 내가 마셨던 건 이전의 것들보다 느낌이 달랐다. 엄청 시원하고 칼칼하고 달달하기까지 했다.바로 그날,애절하거나퍽퍽한 냄새거나 쓸쓸한 새들의 주검 앞에서 느껴지던 갑갑증을 진저비어가말끔히 씻어 주었다.
그때부터 진저비어는 나의 패브릿 드링크가 되었다. 너무 톡 쏘지도 않고 밍밍하지도 않아 내 몸에 맞다. 사별의 슬픔에서 헤어 나오는 그때도 난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얼른, 냉장된 진저비어를 꺼내 마시면 갑갑증이 가셨다.
몇 년 전 이곳에 오니 그 진저비어 팩토리가 나의 집 옆에 있었다.
사는 곳이 평야지대이다 보니 온갖 과일과 채소가 풍성한 동네다. 이 공장에선 생강뿐 아니라 파인애플, 복숭아, 망고, 구아버, 레몬, 패션푸룻 같은 과일을 수확해서 푹 고아 음료수를 만든다. 공장에 들어가면 시음을 해볼 수 있고 시중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난 6개들이 세트를 사놓고 야금야금 마신다.
3년 전에는 한국에서 지인이 코스트코에서 사 왔다며 내게 진저비어 사진과 함께 카톡을 보내주었다. 나의 시아주버님께서는 서울의 동네 슈퍼에서 진저비어를 만나면 반가워서 다 들고 오신다며, 이 공장에 가신날조이라는 직원과 여담을 한 적도 있다.
무엇보다 진저비어는 내 마음 힘들 때 쿨하게 식혀주던 고마운 벗이기도 하다. 나는 그 팩토리 앞을 지날 때마다 마치 향수 같은, 진한 감사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