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렌지 색 이쁜 귤들을 받아서 하얀 비닐봉지에 다담다담 담았다. 귤이 다 익어버린 귤나무 잎들은 아직 짙은 초록이었다. 짙은 귤색도 귤색이지만 내 손안에 들기 딱 좋은 크기로 자라 있었다. 탱자보다 조금 더 굵은 작은 알도 있었으나, 동그스름하고 맨지르 한귤의 얼굴이었다. 정원에서 자란 귤 치고 맛도 달고 즙도 풍부했다. 신선한 알을 삶은 계란껍데기가 그러하듯,나무에서 갓 딴 그녀의 귤도 맨손톱으로 껍질을 벗기기가 어려웠다. 칼집을 내어 귤껍질을 까먹는 일은참신하고 즐거웠다. 귤향이 짙었다.
며칠 전 영어교실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나무 꼭대기 쪽에 달린 귤이 더 달고 즙도 많다며, 같이 따서 가져가라 했다. 금방 두 봉지가 가득 채워졌다. 1년 전 영어반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다가, 내가 그만두면서 소식을 주고받지 못했었다. 서로 마음이 잘 통하던 사이라 가끔 생각이 나곤 했지만, 내가 너무 무심했다. 이게근래의 나다. 나 자신의 현재를 헤집어서 누군가에게 톡이나 전화를 선뜻, 잘하지않는 사람이 되었다. 요즘 들어 그런 일들이 별감응이 없어진다. 그런 내 자아를 가늠해 보고 존중하는 일에 더 친숙해져간다. 귀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서 마음앓이와 몸앓이를 깊게 하고이러는 내 자아가, 밉지만은않다.
어쨌든 그녀도 그러다 다시 만났다. 1년 전보다 낯빛이 맑아진 그녀에게 난, 너 얼굴이 더 좋아졌네, 했더니 싱긋 웃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이 어린 그녀가 쉬는 시간에내 자리로 슬며시건너왔다. 작년 12월에 2년 정도 함께 살던 그녀 파트너, 남편이 사망했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작년 초에 누자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점심을 먹을 때, 파트너가 아프다더니, 그가 속절없이 떠나갔단다. 난 어리둥절했다. 자기 나라에서 만났다는 호주남자를 따라와 국적을 바꾸려던 찰나에, 그의 생을 붙잡지 못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니.
집도 컸고 정원도 넓어서 귤나무뿐 아니라 레몬, 아보카도, 망고, 복숭아나무가 집을 빙 둘러 푸르게 자라 있었다. 분홍색 복숭아꽃은 계절을 거슬러서 햇빛 아래서 환하게 피어있었다.
마당의 복숭아꽃이 떠난 그가 남긴, 그녀를 위한 특별한 꽃다발 같았다.
커피를 끓이고 내가 만들어간 콘프레이크 비스킷을 곁들여내왔다. 그리고 그녀가 뜨개질한 것과 작업 중인 편물을 내어와 보여주었다. 어릴 적에 자기 어머니가 뜨개질을 하셔서 그때 뜨개질을 배웠고, 해외로 수출까지 했다는 그녀, M은 뜨개질박사감이었다. 내가 자랑스럽게 내놓던 이불뜨개질은 물론이요, 빨강 조끼, 자주색 티셔츠, 연두색 조끼... 의 편물들은 방직공장에서 갓 나온 제품들 같았다. 드디어 나를 능가하는 뜨개질 박사가 나타났다. 나는 그런 그녀가 신기하고 대견하고 반가웠다. 내가 원하면 뜨개질하는 방법을 뭐든지 다 가르쳐줄 거라했다.
그뿐인가. 이역만리 피붙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자기 혼자는 못 산다고 했다. 마음이 추슬러지고 주변 정리도 되면 다른 남자를 만날 거라고 담담히 말했다. 아프지 않고 마음씨 좋은 남자를 만날 거라는, 이 여인이 난 갑자기 든든해졌다. 지극히 현실적인 그녀 말이 꼭 맞는 어여쁜 새 옷같았기 때문이다. 난 친정어미라도 된 듯, 불현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단 한 번뿐인 그녀의 생인데, 쓰잘 때기 없이 무겁게 살면 뭐 하나 싶었다. 난 혹시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너무 성급하게 만나지 말고 시간을 좀 두고 만나보라고 해보았다. 그녀도 맞다며 그런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귤 한 봉지와 레몬 두 개는 옆집 칼리할머니네로 나눠드리고, 그녀가 캐고 잘라준 라벤더, 토란, 부추, 허브를 나의 정원 여기저기에 심었다. 꽃색이 고운 코스모스와 금잔화 씨앗도 뜰의 공터와 화분에다 흩뿌려 두었다. 그녀의 꽃씨가 땅을 뚫고 나와 환한 꽃을 피울 때, 그녀의 삶도 점차 환해지길 바랐다. 자기 나라에서 국제학교 선생을 하다 왔다는, 그녀가 준 귤에다 또, 칼집을 살짝 내어 싱긋 웃음을 머금고 귤 두 개를 까먹었다. 여전히 귤향이 향긋했다. 노동 후귤은 엄청 더 달고 시원했다. 유기농인 이 귤껍질은 말려두었다가 차로 우려 마셔봐야겠다.
그 사이 그녀의 문자가 와있었다. 방문과 선물 고맙다고.
내가 만들어 간 콘프레이크 비스킷과 그녀가 따준 귤, 레몬, 그리고 각종 꽃씨들과 모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