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고추를 말리라고요?

- 하면서도, 덥석 받아와 버렸다.

by 예나네

2023. 9. 2. 토. 오전 아홉 시. 팜.


다행히 밤새 비가 안 왔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어제도 난 종일 바빴다. 전날도 집에 든 손을 맞이하느라 몸이 분주했으니, 워워, 오늘은 몸을 좀 뉘어야겠다. 어제는 배를 갈라 볕에 널어둔 붉은 고추를 마당에 그대로 둔 채, 통기성 좋은 홑이불만 덮어주고 밤을 보냈다. 행여 심술 맞은 소나기만 후딱 지나가도, 고추는 쓸모를 잃을 텐데, 행히 맑은 날씨가 고추와 나를 살렸다.


꽃이 시간을 머금어야 세상에 나오듯, 말리는 고추에도 며들 간이 필요하다. 꽃이 빛과 바람을 쐬어야 어여쁘게 피어나듯, 빛 속 붉은 고추도 거풍을 야 바삭하게 마른다. 꽃이 나의 사랑을 받아야 제 구실을 하듯, 거풍 되는 고추에도 내 정성 다독다독 들어가야 고운 춧가루가 될 테다. 꽃이 제 명을 다하면 씨앗이 여물듯, 고추의 샛노란 씨앗도 고추의 물기가 온전히 빠져나가야 달그락 거린다. 시간과 햇살과 바람과 정성 없이 씨앗을 획득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그래, 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 보니 우린 늘, 분주한 지도 모른다. 러다 한 번씩 우린 또, 어쩔 수 없는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인간이 된다. 꽃을 피거나, 건고추에 이르게 하는 일이 귀찮거나, 하찮은 일이라 여겨질 때가 있다.


어제 쪽파를 가지러 갈 때도
마음이 수런거렸다.


전날에 몸이 고단해서일까. 마음이 썩 내키진 않았다. 두 식구 입에 들어갈 쪽파를 얼마나 먹는다고, 하며 집에 마냥 있고 싶었다. 그러다 그녀가 오전 아홉 시에 오라 해서 십분 전에 집을 떠났다. 끌려 나오듯 했는데, 집 밖을 나오니 안에서 예견했던 것보다 쾌하고 상쾌하다. 평선에서 하늘과 이어진 평지의 들판이 초록초록 드넓다. 사탕수수이거나, 자줏빛 고구마이거 다 생명체이니, 그들의 들숨과 날숨이 내 안으로 전해온다. 잔잔한 파동. 검둥소슬렁대며 풀 뜯는 목가적 풍경이 다, 내 것슴이 차오른다. 하늘 품으로 품어주는 대자연 마음을 뉘며 운전을 한다. 자연에 든 경지가 경외롭다. 제 그녀가, 언니, 우리 팜으로 와서 쪽파 좀 뜯어가요, 라 하지 않았으면, 좁은 방구석에서 천정만 멀뚱히 쳐다보고 있을 뻔했다.


그녀의 팜에서 먼지가 폴폴 날렸다.


두어 달 가뭄이 먼지를 증폭시켰다. 뽀얗게 먼지가 앉은 세발 달린 오토바이 뒤에 내가 앉자, 그녀 오토바이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일본 학생들이 따고 있는 화이트 주키니밭을 지나고, 한 줄 뿐인 배추밭을 통과하고, 그녀네 주작물인 고추밭 곁에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자그마한 체격에 생글생글 웃음기 많은 그녀가 쪽파를 뽑기 시작한다. 공들여서 힘들게 지은 농산물을, 쑥쑥 뽑기만 하는 건 수월하다. 능률이 배가된다. 순식간에 두 포대의 쪽파가 내 것이 되었다. 나는 쪽파밭을 점령할 듯 뒤덮은 쇠비름을 뽑아서, 쪽파가 든 포대에다 쑤셔 박듯이 담았다. 순식간에 내 손톱밑이 까맣게, 까마귀처럼 된 것을 보며 그녀와 마주 보고 호호 웃었다. 또 세발 오토바이를 타고 막사로 돌아왔다. 나눠주기 좋아하는 그녀는 화이트 주키니와 이름도 모를 노란 열매와 붉은 물고추까지 꺼내와서, 한아름씩 떠안긴다. 엉겁결에 받은 는, 고추를 말리라고요? 하면서도 덥석, 받아와 버렸다. 겐 다, 짙은 향수 어린 생물들이다.


그녀의 남편은 오늘 쉬는 날이라 안 보이고, 한국에서 그저께 도착했다는 그녀 친정동생, 그녀 아들 둘,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온 일본 젊은이들에게 미안하여, 그녀 시간 될 때 따로 만나자고 인사하고 새 꽁지 빼듯 쏙 빠져나왔다. 공수해 온 온갖 것을 뒷마당에 풀어놓으니 일이 태산인 만큼, 마음이 부자 된 듯 풍요하다. 온종일 다듬고, 씻고, 절이고, 삶아 쇠비름나물을 조물조물 무치고, 파김치를 가득 담았다. 리고 고추의 배를 갈라 멍석에 나란히 눕혔다. 렌지색 저녁답이 돼서야 짬이 나, 봉지봉지 담아 이웃에 푸짐하게 나눠주었다. 붉은 고추는 마당에서 직 건조 중이다.


달큼하게 매운 고추향에서, 멍석에 고추 말리던 고향의 정취가 어린다.

이국의 햇살과 바람 속에서도,
고추는 쉴 새 없이 마른다. 코리언 양념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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