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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Dec 28. 2023

폐허보다 보살핌이 쉽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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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작품 <거울>에 대해 설명하면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끌어들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우선 두 작품은 모두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단순히 아름답거나 또는 고통스러운 추억으로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구원'을 꾀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이 자신의 회상을 따라가는 길'이 바로 '자신의 자아를 되찾게 되는 길'이며 '부활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김용규, 같은 책, <거울> 편  p.166.


사람, 세 자녀와 나무를 남겨두고 떠난 그의 자리를 유지하며 보살피는 데는 시간과 이 많이 들어갔다. 어제만 해도 그가 있을 때 내가 세 자녀양육에만 전념하고 있었다면, 그가 떠난 오늘의 시간은 내게, 없이 많은 일들을 요구했다. 고물고물 한 보드라운 살의 새끼 나의 아이들과 이천 오백 그루의 배나무가 심어진 땅을 골고루 돌아보아야 했다. 시간을 무심히 지체하면 새끼들과 나무폐허가 될 테니, 난 그가 없는 오늘부터 성심껏 그가 남기고 떠난 그의 분신들을, 온리, 홀로 듬어야만 했다. 한 톨의 예고도 없이 지난한 중량감을 부여받고 말았다.


내 의지 상관없이  새로운 판이 짜였다. 운명이라 여겨봐도 그건, 색하고 난해하고 어리둥절하였다. 가슴이 아리 저리니 눈건조했다. 다급하니 눈물이 메말랐다. 매달 하던 달거리도 검고 딱딱하게 겨우 폐허의 알갱이처럼 삐져나왔다. 곤경. 그렇게 또 다른 향방의 뿌리내릴 곳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내어야 우리 가족들이 살아질 것이었다. 허로 방임하는 것보다 보살핌으로 하루하루, 뿌리가 깊이로 박히어 자라나는 나무로 살아있도록 건사하는 건 그래도, 성취감에다 희망을 얹어두는 일이다. 성취에 의한 희열감은 고생 끝에 익어가는 열매 같으니 내면의 컨디션나브로 강건해진다. 우리 몸은 어지간히 일해서 닳지 않는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다.


결혼하고 8년 동안, 그는 일귀신처럼 과수원을 일구어내었다. 어린 배나무가 조금씩 배를 달기시작하여 돈이 되려던 그해에 그는 떠났다. 일하다 자신의 숨을 잃은 그의 그간의 시간들이 안타까워서 나는 과수원을 떠날 수 없었다. 선은 익혀놓은 일을 따고 저장하였다가 포장하여 가락동에 가서 팔아야 했다. (해는 매번 김 회장님이 돈을 정산해서 가져다주셨다. 스무 번이 넘는 횟수를 하루같이 변함없이 그렇게 해주셨으니 정말 감사하기 그지없다.) 이듬해부터는 내가 농사지은 배를 그가 한 것과 유사하게 포장하여 가락동 도매시장 내 이름으로 내놓았고, 그 이튿날 아침엔 돈을 받으러 그가 다녔던 동일한 경매시장으로 갔다. 그의 피 같은 노동으로 벌어놓고 간 돈 내가 지불하고, 큰 시숙님께서 사람을 시켜 수속을 온전히 끝내고 과수원 마당에까지 갖다 주신, 내 것이 된 녹색 프라이드를 운전하고 가서 대금을 받아왔다. 8년을 더 그렇게 과수원 한복판에 머물면서 자식농사와 배농사를 지었다. 산처럼 그랗고 이쁜 땅도 기름진 토였지만, 그 대지 위에다 가 밑바탕을 탄탄하게 그려놓고 갔으니, 배값은 매해마다 돈이 되었다.


난 이 책 <거울> 편에 나오는 타르코프스키의 서럽다는 이 문장을 사랑하고 동의한다. "행복하려고 욕망하는 자는 바로 그것을 위해 행복하고자 하는 그 욕망을 초극해야 한다." 가령 자작나무가 자신의 하얀 몸에 난 숱한 상처에도 변함없이 시간을 새기, 그것이 자신의 운명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순리대로 뿌리를 내리 제자리에 바람과 햇살과 빗물과 폭풍을 맞으며 서있다 보면, 그 안에서 행복도 푸른 기운으로 자라난다. 편이 떠난 사실이 불행하다고 해서 온전히, 100%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러니 행여라도, 당신의 남편과 당신의 아빠가 당신 곁에서 살아계신다고 해도, 우월감은 갖지 말라. 행복은 그늘 속 빛처럼 려앉는다. 그 안에서 맞이하는 행복은 더 빛난다. 빛을 닮은 아이들의 때깔 고운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이들은 언제나 힘이다. 꿈이고 보배다. 짙은 그늘 속으로 들어오는 그 햇살 그려내는 흔들리실루엣선율조차도, 다 여쁘다. 종소리처럼 흩어지는  스팩트럼조차 하나하나 끌어모으고 싶도록, 다 귀하다.  언제 어디서나 기품이 있으며  공평다. 무엇보다 환하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곁엔 항상 빛이 있다. 빛이 있어 어제의 뿌리가 깊이로 든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 <거울>의 첫 번째 테마라 할 수 있는 '반영'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넘어질 때 여기 있는 다른 것들도 넘어졌어요. 뿌리, 관목들. 이런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식물도 느끼고, 느낌을 가지고 있고 어쩌면 이해까지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 ) 어쨌든 나무들은 서두르며 돌아다니지 않아요. 우린 항상 바삐 뛰어다니죠. 안달하고 사소한 말이나 해대며. 우리는 자연을, 그리고 우리들 내면을 믿지 않기 때문이에요. 우린 항상 뭔가 불신하고 항상 서두르죠.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 김용규, 같은 책 <거울> 편 p. 181.


3부가 후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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