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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별똥별 같은 거

by 예나네


이야기는 약 20년 전 어느 지방에 별똥별이 떨어졌고 그로 인해 한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모두 떨어진 별똥별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차츰 그것이 별똥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김용규, 같은 책, <잠입자> 편 p.209


별똥별 신비는 무지개를 능가한다. 탁구공만 한 쥐란 놈이 눈앞에서 휙 지나가 제 몸을 숨기면 시락거리는 기척이라도 내지만, 별똥별은 속도에 매몰된 듯 살같은 빛의 사선 취를 지운다. 그 유성의 신비를 마음에다 기듯, 별똥별을 본 사람들은 의 속도로 소원을 말한다. 난 요 근래 이국의 하늘에서 별똥별을 목격했다. 지만 한,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글잘쓰게 해주소서! 이 여덟 자의 소원을 유성으로 말해야 했었는데, 하고 무릎을 탁 쳤으니. 이미 늦어버렸다. 엉거주춤한 순발력!


어쩜 우리에게 지나간 시간은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거의 시간은 한 점 먼지보다 작을 때가 있다. 그때로부터 15년 에 과수원 한복판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고, 8년째 되던 해에 한순간에 별이 된 남편을 보내었고, 8년 동안 이천 오백 그루의 배나무와 초, 중학생이 세 아이들을 혼자 키워낸 그 시간들이, 별똥별 지나가듯 쾌속으로 흘러가버렸다. 어쩜, 타임캡슐로 가슴에 이 맺혔을도. 하튼 전혀 다른 세계, 도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 네 식구는 낯선 곳에 떨어진 별똥별, 전과 생판 다른 노동과 학업을 이어 갈 우주의 한 점 먼지가 되었다.


자연으로 둘러싸인 만 육천 평의 대지를 뒤로하고, 삼십 평의 아파트 상자에 갇힌 듯 한 생활은 소꿉장난 같았다. 당시 내겐 그랬다. 드넓은 땅 위에서 거칠고 험준한 온갖 노동을 도맡아 할 때 흙먼지와 풀내음은 났어도 두통은 없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가벼운 장을 보고 들어와도 코가 따갑고 몸이 피로해지고 두통이 일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 나갔다 귀가한 날은 속 메슥거림이 심해다. 분당은 다른 도시에 비해 녹지율이 더 높은 계획도시임에도 내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킨 걸 보면, 내 바디는 컨츄리걸에 적합한 듯!


그런 중에서도 논술을 가르치기 위하여 아이들을 모집하였고, 이사 온 지 두 달 후부터 학생들이 오기 시작하였다. 과수원에 살 때부터 장거리로 다니던 수필반에도 계속 출석하였고, 1년 후부터는 수지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중2 때 도시로 나온 큰딸은 자기가 고3인데, 엄마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며 어느 날 현듯 화를 내었다. 난 가정일과 사회성 사이에 낀 나의 좌표에서 잠깐 서성거리다 어쩌지도 못한 채 떠맡은 일들에 열중하면서, 시간의 강물에 떠밀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 논문을 쓰기 시작하여 새벽 두 시까지 독서실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100쪽짜리, 수필에 관한 논문을 완성하였다. 그때 중3이던 큰딸은 묵묵히, 엄마의 과제를 도와주었다. 새벽마다 어깨에 메고 오는 엄마의 책가방을 열어 초고로 갈겨 쓰인 글자 한 자 한 자씩 짚어가면서, 자판기를 또닥또닥 두드려아이가 입력해 주었다. 100쪽까지 온전히 다 워드를 쳐 주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 대견한 딸이었다. 둘째 딸은 엄마의 책가방을 독서실 앞까지 메어다 주며 엄마, 파이팅, 하면서 배시시 웃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난 수필집 두 권을 출간하였다. 렇듯, 구의 삶이 그러하듯 그저 살다 보면 리는 시나브로 깊이로 든다.


도시에 산 지 5년째 되던 해, 6학년이 된 막내가 두통이 자주 있어서 병원에 데려가 보았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평소 밝은 성격으로 서현 로데오거리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서너 번씩이나 제의받았었고, 달리기까지 잘하여 인기를 얻었는지 학급임원으로 뽑히던 그 이가 중학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화장실에서 낯선 형한테 맞았다고 하였고, 또 다른 날은 다른 반 친구한테 맞고 들어왔다. 는 그날 밥벌이던 논술수업을 먹어야 했다. 천금 같은 내 아들의 눈가에 핏자국과 멍자국을 확인하고, 그 길로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학교에 달려가서 담임을 만나 때린 아이를 말하였는데, 어린 여교사였던 담임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잠잠하기만 하였다.


난 그저 기가 콱 막혀 멍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젊었던 나도, 처음 겪은 일이어서 어찌해야 하는지, 정답이 없었다. 그냥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와서 내 아이를 달랬다. 내 아이는 엄마, 제발 가만히 있어, 엄마가 학교에 가고 그러면 때린 그 아이가 나한테 더 못 댔게 굴 거야, 라며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난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아야만 했다. 난제 앞에서 며시 겁도 났다. 나 혼자 어쩔 줄을 몰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 된 그 많이 생각났다.


그해 대학2학년이던 첫째 아이는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는데, 난 아이가 비행기 실려 날아가는 광경을 본 후, 집에 돌아와 그 이별 앞에서 목놓아 엉엉 울었다. 중, 고생이 된 남은 두 아이들이 우는 엄마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난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큰아이 어학연수 4개월째 되던 날, 호주로 온 가족이 다 함께 가서 영어를 배워오기로 세 아이들과 논의여 결정다. 세 아이를 차례대로 이런 식으로 떼어놓다가는 어미의 애간장이 저리다 못해, 녹아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유학수속을 밟아서 도시생활 7년을 접고 선 도시보다 더 낯선, 또 다른 행성으로 우린 훌쩍 날아왔다. 똥별.


행여 아이들 아빠, 그가 해외까지 못 따라올까 봐 큰아이의 호주수업 시작일이 4일이나 지난 우리 결혼기념일날 출국하였으니, 그도 호주 하늘까지, 른 시차 이동하여 리 곁에 잘 착했으리라 안도했다.


많은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이 있었지만... 결코 후회하지도, 누구를 부러워하지도 않았고요... 바로 그게 운명이지요. 그게 삶이고 그게 우리이지요. 우리 삶에 슬픔이 없었다한들 더 낫지는 않았겠지요. 더 나빴을 거예요. 그랬더라면 행복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희망도 없었을 것이고요. 삶이란 그런 것이지요. 김용규, 같은 책, <잠입자> 편 p. 243




* 목요연재를 아직 미완성으로 남겨둘까 합니다. 그간 써 둔 글 6편이 더 있는데, 그저 마음속에다 고이 간직해두고 싶어 졌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만성두통이 있는데, 이 연재가 두통을 부추기네요. 나머지 힘으로 매거진에서 자유롭게 만나 뵙겠습니다.
그간 라이킷과 댓글로써 응원해 주신 글벗님들, 무진장 고마웠어요. 정말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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