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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네 Dec 04. 2023

잎이 꽃을 낳다

     

  그해, 이 나라는 여름이었다.


나뭇잎은 바람 부는 하늘에서 물고기 떼처럼 파닥이고 있었다. 숲은 높고 넓고 깊었다. 숲이 깊은 만큼 가을과 겨울에 펼쳐질 이 대륙의 장엄한 풍경을 나는 기대했다. 오색단풍의 색깔을 오지게 맛볼 거라고. 발목까지 차오는 커피색 가을을 밟으면 낙엽이 영혼처럼 운다는, 구르몽을 떠올리며 낭만을 만끽하리라고.   

   


  하지만 이곳 브리즈번 사람들이 단풍과 나목의 이미지에 무지한 건 필연이다. 이 나라 나무들은 게으르다. 게으른 듯 느리고 느린 듯 내면의 색채가 분명한 자국인을 닮았다. 벌레가 갉아먹은 상처도 치매처럼 잊어버리고, 무에 그리 미련이 남는지 사계절 내내 초록의 감옥에 잠긴 듯 나무는 초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낙엽은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지지도 않고 시나브로 헐겁고 느리게 진다. 낙엽 쓸어 담는 소리는 봄날에 더 익숙하게 들린다.

  

말도 거꾸로 하고 계절도 거꾸로 가고 있었다. 나사의 방향과 하수구의 회전방향까지 거꾸로 돌아간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 남반구의 섬나라에 온 첫 해, 내 자아도 거꾸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자유롭다고나 할까. 계절과는 상관없이 달이 차면 아기가 탄생하듯, 꽃도 봄·여름·가을·겨울 수시로 피고 지고, 또다시 피곤하였다. 꽃의 습성 또한 곁 사람 눈치 안 보고 살아가는 제 나라 인간들의 성질을 쏙 빼닮았다. 봄꽃·화무십일홍·가을단풍·겨울나목. 이 고정된 관념은 싹트는 씨앗 껍질이 벗겨지듯 내 안에서 깨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 손님이 드는 날이면 물고기와 암탉을 잡았다. 물고기 비늘이 벗겨지고 뜨거운 물에 튀겨진 닭털이 거의 다 뽑힐 즈음, 어린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돌리곤 했다. 얼마 후 다시 눈을 떠보면, 아직 핏기가 감도는 좁쌀 같은 물고기 알과 암탉의 말랑말랑한 알이, 갈라진 동물의 뱃속에 담겨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생명에 대해 어렴풋이 알아갔다. 알을 낳는 어미가 있어, 생명의 순환이 가능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물고기나 암탉은 제 똥꼬에서 알이 나올 때 더 파닥대거나 꼬꼬댁거리며 해산의 통증과 해소의 기쁨이 융합된 징후를 보인다. 어린 나는 암탉이 꼬꼬댁거릴 때마다 쪼르르 달려가서 갓 낳은 따끈한 알을 꺼내어 아버지께 갖다 드리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젓가락으로 구멍을 내어서 알을 한 번에 쭉 들이키셨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인 잎들도 제 알 낳은 기별을 수런거림으로 알린다. 벌이 윙윙대고 나비가 잎사귀 위로 나풀나풀 날아든 그날, 나는 잎들의 꽁무니에서 잎의 알들이 조롱조롱 나오는 걸 보았다. 동물의 뱃속에서 보았던, 그 알과 비슷하게 생긴 알이었다. 물고기나 새의 알처럼 잎의 알도 기운이 한껏 부풀어 올라 말랑말랑하게 생명이 감도는 타원형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꽃들도 알을 깨고 톡톡 터져 나왔다.

 나는 병아리의 보드라운 숨결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듯이, 잎이 머금었던 꽃의 숨결을 코끝으로 음미해 보았다. 잎의 내음 같기도 꽃의 향기 같기도 한 이 둘 사이는 닭과 계란관계처럼,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잎과 꽃은 동일한 유전자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잎이 초록에 갇혀 지낸 이유를 나는 깨달았다.

  

암탉이 살갗과 깃털로 따스하게 알을 품었듯이, 잎은 잎의 지문인 바람과 빛의 흔적으로 알을 품고 있었던 거다. 암탉이 날개를 펼쳐 병아리를 거두었듯이, 잎은 초록의 날개로 광합성의 펌프질을 쉬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꽃은 활짝, 활짝, 깨어났던 거다. 그때서야 잎은 초록을 벗어버리고 빛바랜 낙엽이 된다.

  

낙엽은 제 몸뚱이 삭혀낼 시간을 견디어 부토가 되고, 다시 푸른 잎이 되리라. 그리고 또, 잎은 꽃을 낳으리라. 꽃의 시간이 여물면, 수만 리 장천까지 씨앗을 퍼트려 제 가계家系의 계보系譜를 하늘하늘 이어가리라.


이 글은 2014년 출판된 저의 서책, 《잎이 꽃을 낳다》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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