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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림 Apr 23. 2022

벚꽃 엔딩

-한상림 칼럼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4월이 가고 있습니다. 4월이 시작되면 들과 산에서 앞다퉈 피는 갖가지 꽃의 잔치에 우리 마음도 술렁거리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집니다.


  오미크론 감염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집 안에 갇혀 지내다 보니 꽃이 피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딸과 아들이 확진되어 2주간을 함께 자가격리를 하면서 외부활동을 못 했는데, 결국 피하지 못하고 확진자가 되어 남은 가족과도 격리된 채 안방에서 혼자 지내야 했습니다.  바이러스 감옥에 갇혀 심하게 앓는 사이 카톡으로 날아오는 꽃 사진들에 그만 심쿵, 숨이 멎을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자가격리가 해제되자마자 벚꽃길로 뛰쳐나갔습니다. 사방팔방 만발한 꽃들의 잔치마당에서 약 3주간 견뎌낸 설움이 급하게 폭발한 거겠지요.


  4월에 피는 꽃 중에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하는 꽃이 바로 벚꽃입니다. 땅끝 남쪽에서 시작되어 북상하면서 서울까지 올라오는 꽃망울 터지는 소리는 마치 팝콘이 터지는 것과 같습니다. 탕탕탕 … 꽃잎 벙그는 소리에 내일을 알지 못하는 환자의 희미한 숨소리조차 잠시 가쁘게 살아날 것만 같은 활력이 넘치는 4월입니다.

 

  그런 벚꽃이 지고 있습니다. 심술궂은 바람과 봄비가 한바탕 휘젓고 나면 여린 꽃잎들이 꽃비 되어 흩어지면서 흔적 없이 사라질까 봐 꽃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꽃잎 진 자리마다 모눈종이에 찍힌 점처럼 파릇파릇 새 이파리가 돋아납니다. 새잎은 햇빛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여린 가지를 여물려 그늘을 넓혀가는 허공에다 새 길을 내겠지요.


  우리의 삶도 해가 바뀌면서 봄을 맞이하고, ‘나이’라는 숫자를 따라 한 그루의 나무처럼 돌고 돌면서 새순 돋워 새 가지를 만들고, 그 가지로 인생이라는 나무에다 나 자신을 그려 넣으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이라는 나무’ 역시 허공에 발을 딛고 살다가 툭 하고 떨쳐진 꽃잎처럼 생을 마감하는 시간이 참으로 짧고도 아쉬운 순간이 아닐까요?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절반도 남지 않은 나머지 시간 앞에서 마냥 숙연해집니다. 벚나무는 겨우 1주일이라는 시간을 위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최선을 꽃피웠을 것입니다. 1주일이라는 시간이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면 짧게 보일지 몰라도 나무는 시간의 개념보다 공간의 개념으로 몸통은 굵어지고 새 가지로 새길을 내는 거겠지요.


  따라서 벚꽃이 피었다 지는 건 혁명 같은 희망의 봄이 우리에게로 왔다가 다시 또 새로운 희망을 주기 위해 잠시 떠나는 ‘봄’이라고 생각합니다. ‘봄(春)’은, 기다리는 작은 소망들이 커다란 희망으로 다가올 메시지를 떨어지는 꽃잎에서 바라보는 거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바라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하나요? 철들면서 욕심을 떨궈야 한다고 깨닫게 되지만 막상 나이가 들수록 걱정거리와 바라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니, 이 또한 아직은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벚꽃이 집니다. 지고 있는 꽃잎에 슬며시 말을 건넵니다. “제발, 우크라이나 국민의 아픔과 고통이 하루빨리 끝날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전해 달라고요”. 우연히 카톡에서 올라온 동영상을 보고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습니다. 한 여성이 성폭력을 당한 후 발목이 묶인 채 발가벗겨져 러시아 군인들에게 매를 맞으며 머리카락에 불까지 붙여 놓더니, 짙은 색 페인트를 손에 쏟아주면서 얼굴과 온몸에 바르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살기 위해 하라는 대로 하면서 던져준 돌멩이 위에 한쪽 손을 올리자마자 돌멩이로 내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차마 끝까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젊은 여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절규가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런 행동을 저지른 러시아 군인들 역시 제정신이 아니겠지요.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있다고 하던 말을 바로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읽습니다. 전쟁흉악범으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푸틴의 잔혹함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안타까워만 할 뿐입니다. 이웃 나라에서 겪는 일을 그냥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만은 절대로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외칩니다. 이미 우리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서 이보다 더 잔인

한 죽음을 전해 듣고 사진 속에서 보았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너무 많은 생명이 떨어져 나 뒹구는 꽃잎처럼 짓밟히고 뭉개지고 토막 난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한시라도, 단 1초라도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종식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희망’이라는 꽃잎에 실어 보냅니다. 아니, 우크라이나 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겪는 사람들이 고통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기아와 지진과 가뭄과 홍수와 쓰나미와 산불로 겪는 갖가지 자연재해와 질병의 고통까지도 훅 날려버리고 싶습니다.


  꽃잎이 떨어져 흩날리고 난 자리에 새 가지가 돋듯, 그렇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도 머잖아 끝나게 될 테지요. 그리고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면서 두 나라 국민은 서로의 잘못을 남 탓하면서 다시 희망의 씨앗을 뿌릴 테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연의 순리와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자연을 닮아가며 순연하는 것만이 평화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푸틴이 좀 깨달았으면 합니다. 주술, 복서, 점술 등으로 신선이 되어 늙지 않고 영원히 삶을 누리고 싶었던 중국의 진시황제도 죽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전 국민의 30%가 이미 오미크론에 확진된 후여서 정부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사실상 전면 해제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으로 너무 오랜 시간 겪은 우리의 피로감은 극도로 달해 있습니다. 이제는 제발, 제발 벗어나고픈 바이러스와의 전쟁도 끝나갑니다. 물론 아직은 성급한 판단일지는 몰라도, 어둠 속에서 반드시 새 나리 밝아오듯 희망이 보이진 않지만 이미 우리 곁으로 와 있습니다. 자연 앞에서 영원한 생명이 없듯이, 영원한 고통 또한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처럼, 인류 전체가 겪어 온 바이러스와 전쟁 역시 새로운 희망의 봄에게 곧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오늘은 우리 같이 걸어요. 이 거리를 … 봄바람 흩날리는 벚꽃 잎이 많군요, 좋아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벚꽃 엔딩’ 노래를 듣다 보면 버스커 버스커의 특색 있는 목소리가 중독성이 있어서인지 자꾸 흥얼거려집니다. 특히 4월 벚꽃이 흩날리는 날이면 이 노래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노랫말처럼 사랑하는 연인과의 추억 때문에 흩날리는 거리를 걸으며 그대여, 그대여 하면서 외치고 싶은 걸까요? 결코 그런 이유만이 아닙니다.


  꽃잎이 흩날리는 봄날 오후,

강물이 보이는 작은 벤치에 혼자 앉아 흩어지는 꽃비를 휴대폰 카메라로 렌즈 속으로 끌어당겨 보았습니다. 쏴아~ 바람이 불자 한꺼번에 쏟아진 꽃잎들은 허공을 맴돌다가 바닥으로 혹은 다른 나뭇가지와 강물 위로 사뿐히 내려앉을 뿐 렌즈 안으로 단 한 장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희망은 내 안에 들어왔다고 느껴지면서도 진정 잡으려고 하는 손바닥 안에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뭉개진 상처들을 아물게 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이 봄이 가기 전에 꽃잎에 듬뿍 담아 보내고 싶습니다.     

바람에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낧렸지만 아무리  줌인을 해봐도 렌즈 안으로 꽃잎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아픔 속에서 보이는 희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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