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 설렘비에 스며든 기억
비는,
공기 중 수증기가 응결되어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며
구름에서 지면으로,
그리고 어느 날은 마음으로도 내린다.
계절, 온도, 바람, 시간에 따라 그 얼굴도 달라진다.
가랑비, 소나기, 장대비, 겨울비.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이고,
누군가에게는 시작이다.
비가 오면,
마음도 함께 느려진다.
세상이 조용히 흐려지고,
잊고 지내던 기억들이 다시 선명해진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빗소리에
그날의 감정이 조용히 떠오른다.
그날도 비가 왔다.
계절이 바뀌기 직전,
가을과 겨울 사이의 비였다.
축축한 공기와 잔뜩 내려앉은 하늘,
그리고 눈 대신 부드럽게 떨어지던 빗방울.
그와 단둘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
감정은 천천히, 가랑비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모든 것이 낯설고 조심스러웠던 나날들 속에서
가끔 웃음을 건네던 사람이 있었다.
밝지만 조급하지 않고,
유쾌하면서도
조용한 안정감을 지닌 사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퇴근 후에 저녁 같이 먹을래요?”
그는 나보다 한 시간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집에 들렀다 다시 나왔다.
늦은 오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쌀쌀한 저녁.
우리는 회사 근처, 따뜻한 조명이 반겨주는
작은 식당에 마주 앉았다.
식당에는 때마침 우리 둘 뿐이었다.
대화는 특별할 것 없었다.
서로의 직장 이야기,
살아온 동네.
건조하고 평범한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 마음 어딘가가 촉촉해지더니
조금은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는 밝고 유쾌했지만,
동시에 진중하고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의 말투와 온도,
그리고 그 앞에서 잔잔해지는
내 감정의 진폭.
나는 평온하고,
감정의 골이 깊지 않은 사람을
언젠가부터 동경하고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를
묵묵히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
그런 느낌이었다.
식당을 나설 때,
비는 여전히 부드럽게 내리고 있었다.
각자의 우산을 썼지만,
어쩐지 마음은
벌써 그에게 기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비는 쓸쓸하지 않았다.
설렘만 조용히, 은근하게 스며들었다.
비가 오면
늘 기분이 가라앉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의 비는 설렘처럼 내렸다.
말보다 먼저 마음을 적시고,
예상치 못한 순간을 데려왔다.
비는 언제나
슬픔만을 담고 오는 건 아니다.
감정도, 만남도,
가끔은 예측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찾아온다.
그리고 그 불확실함 속에,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날 이후,
내게 11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던 가을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아 있다.
비가 또 내릴 때면,
그 사람과 마주 앉아 나눈 조용한 대화와
설렘의 기분이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때의 11월로 되돌아간다.
선명한 빗소리와 나긋나긋한 대화가 뒤섞인,
그 계절의 골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