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자꾸 바람을 쐬러 나가는가
바람은,
두 기압 사이의 틈에서 시작된 공기의 움직임이다.
온도차와 기압차가 클수록 빠르고 거세게 분다.
하지만 그 아래,
지형과 습도, 마찰과 온도 같은 수많은 변수들이 개입된다.
단순한 원리로 시작한 바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온다.
실바람부터 싹쓸바람까지,
우리는 그 흐름에 이름과 마음을 붙였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것.
흔들고, 지나가고, 다녀간 자리마다
조용히 마음의 흐름을 흩트려 놓는 것.
바람이 분다.
밖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누군가는 그런 날을 '예민하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내 안에서는 아주 복잡하고 소란한 태풍이 일고 있다.
평소라면 지나칠 법한 별일 아닌 일들이
내 마음에 닻을 내린다.
지나간 대화 한 조각, 미처 끝내지 못한 업무 한 가지,
'그냥 넘겨도 되는데…' 싶은 감정들이
하나씩 내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감정이 몰려온다.
분명 아침엔 괜찮았는데,
마음 안쪽의 바람은 된바람쯤 되었을까.
겉으론 조용한데, 속은 크게 휘몰아친다.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든 버텨야만 한다는 생각이 서로 충돌하는 상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마음의 바람은,
내 마음의 우울을 흡수하고 거대한 태풍이 되고,
마침내 모든 것을 삼킨다.
나는 평범하게 앉아 있지만,
속에선 머리카락 하나도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거센 회오리가 돈다.
그 바람은 벗어날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생각은 생각을 만들고,
고민은 또 다른 고민을 부른다.
숨을 쉬려 할수록, 더 숨이 막히는 느낌.
밀려오는 강한 바람에 떠밀고, 날려버린다.
지금 괜찮은 건지, 정말 나만 이런 건지,
이렇게까지 흔들릴 일이 맞는지,
스스로를 의심하는 질문들까지 바람을 타고 몰려든다.
그럴 땐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반응한다.
바람을 쐬러 나간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정확히는 바람에게 나를 맡기러 가는 것이다.
마음이 감당하지 못한 것을, 바람에게 넘기려는 듯이.
걷다가, 바람을 만난다.
골목을 스치는 소슬바람이 뺨을 쓰다듬고,
한강변에선 등 뒤를 미는 듯한 산들바람이 따라붙는다.
속으로 몰아치던 감정은
바람의 결을 따라 조금씩 흐려진다.
마치 누군가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토닥이는 느낌이다.
해결도 조언도 없지만, 그냥 함께 있어주는 다정함.
바람은 그런 위로를 줄 때가 있다.
특히 된샛바람처럼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날엔
방금 전까지 애써 가라앉혔던 감정을 다시 끌어올리고,
괜찮다며 버텼던 마음을 또다시 헤집어 놓는다.
머리를 헝클고, 코끝과 눈시울을 건드리는 바람.
그 바람 앞에서는 종종 도망치곤 한다.
생각보다 날카로운 바람이었다고,
오늘은 너를 맞을 준비가 안 됐다고.
하지만 너는 항상 묻지도 않고 나를 찾아온다.
그럼에도 나는 자꾸 바람을 찾게 된다.
기대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그 다양한 바람 중에는,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결이 있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햇살과 함께 불어오는 실바람,
속도를 줄이지 않아도 조용히 스며드는 바람,
걷는 나를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
그 바람들은 나를 다시 걷게 만든다.
자전거를 타며 달릴 때,
바람을 정면에서 마주한다.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다.
할 말은 많은데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생각은 넘치는데 정리는 되지 않을 때,
나는 바람을 따라 속도를 낸다.
페달을 밟는 힘에 따라
감정이 한 겹씩 벗겨져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끝에 도달했을 때,
나는 조금 덜 복잡해진 사람이 되어 있다.
또 어떤 날은 차를 몰고 멀리까지 간다.
흙냄새, 강바람, 계절의 기운.
하늬바람처럼 어떤 바람은 마음속 응어리를 통과한다.
붙잡고 있었지만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
입 밖에 꺼내진 않았지만 오래 쌓여 있던 것들.
그걸 바람이 조용히 훑고 데려간다.
나는 안다.
‘바람을 쐰다’는 말이
단순히 환기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그건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잠시 바람에 맡겨두는 일이다.
꼭 걸을 필요도 없다.
꼭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
가끔은 놀이터 그네에 앉아
발을 세게 구르는 것만으로도 바람을 만날 수 있다.
그 마저도 어려운 발이 무거운 날엔,
창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는다.
예전엔 바람이 더 자주 나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 흔들림조차 수용하게 되었다.
때로는 흔들려도 괜찮다고,
흔들려야 멈추는 것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나는 나만의 리듬을 갖게 되었다.
감정이 벅찰 땐
바람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지혜가 생겼다.
그건 어느새 습관이 되었고,
나를 구해준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정신없이 흘러간 하루의 끝에서,
소리 없이 찾아오는 감정의 가벼움.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나는 그때 비로소
‘괜찮아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바람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어떤 날엔 노대바람처럼 휘몰아쳐 나를 무너뜨리고,
어떤 날엔 산들바람처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바람을 찾는다.
그 바람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곁에도 불고 있기를.
그 안에 나를 위한 결이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