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차, 리스본
우리보다 먼저 포르투갈을 여행한 엄마에게 여행기간 동안 여러 차례 문자를 받았다. 파두는 들어봤냐고. 볼 것 많고 먹을 것 많고, 어쩌다 보니 만나는 사람도 많았던 일정이라, 파두를 위한 시간을 따로 빼기가 어려웠다. 리스본에서 저녁 한 끼는 식사와 파두 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파두 하우스에서 하기로 예약했다. 포르투갈 여행 동안 식당 예약이 몸에 배었다. 예약을 완료하고, 라고스를 떠난다.
벌써부터 라고스가 그립다고, 이 마을에서 하루를 더 보낼 걸 그랬다고 아쉬워하던 아내는 이내 잠에 들었다. 고된 일정이다. 포르투에서 매일 2만 보가 넘는 걸음을 걷고도, 끼니마다 와인 한 병씩을 비웠다. 리스본까지 세 시간, 차에서라도 쪽잠을 잔다면 조금이나마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가 잠에 들면, 글을 쓸 시간이다. 포르투와 라고스를 문장으로 남겨두고 싶다. 그럴싸한 문장이 찾아왔다가, 금세 떠난다. 운전 중이라 메모를 남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입으로 되뇌며 기억을 하려고 애쓴다. 새로운 문장이 찾아오면, 입술이 멈춘다. 입술이 멈추면, 첫 문장은 이내 날아가고 만다. 메모리와 디스크 성능이 영 좋지 않다.
머리가 바쁜 고속도로 주행이 끝나고, 리스본 시가지로 들어간다. 갑자기 나타난 큰 다리를 보고 위압감을 느꼈다. 아내를 깨웠다. 라고스 같은 꿈을 꿨던 건지, 아내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해할 만하다. 라고스의 한적함에 취해있다 보니, 도시가 너무 크다.
4월 25일 다리다. 이렇게 이름 붙여지기 전엔 살라자르의 다리였다. 40년 이상 재임하며, 식민지와 전쟁을 벌인 살라자르와 그 후계 정권을 몰아낸 카네이션 혁명을 기념한 이름이다. 현재의 포르투갈, 그 수도 리스본으로 들어가는 좋은 진입로다.
현대사와 관련해 우리가 그렇듯, 포르투갈도 할 얘기가 많다. 포르투갈은 2004년에야 징병제를 폐지했다. 라고스의 밤, 리오는 자신의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전쟁을 겪은 세대라고 말했다. 전쟁이라곤 할 일 없을 것 같은 유럽 서쪽 끝 나라에 무슨 일일까 했더니, 식민지의 독립전쟁이었다고 한다.
이방인이 평가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포르투갈이 세계사에서 변곡점을 만들어 낸 국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20세기까지도 포르투갈은 명실상부한 식민제국이었다. 1960년, 살라자르 정부는 그 위상을 기념하고자 테호 강변에 발견 기념비를 세웠다. 세계사 교과서에 꼭 실리곤 하던 건축물이다. 항해왕자 엔리케와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의 유명 인물들이 동상으로 새겨져 있다.
다만 이 시기 포르투갈은 이미 번영을 잃어가고 있었던 단계였다. 16세기의 포르투갈의 영화를 실제로 상징하는 것은 발견 기념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벨렝 탑이다. 탑은 포르투갈의 수호성인 성 빈센트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고, 테호강 유역을 방어하는 요새로 사용되었다. 인근의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함께 마누엘 1세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그 규모와 화려함에서 당시 포르투갈의 위상을 짐작해볼 만하다. 꽤나 뜨거웠던 햇살 아래, 이곳만큼은 꼭 보고 싶다며 아내를 끌고 가듯이 갔다. 세계사에 환장을 하던 중고교 시절이 떠올라 괜히 눈물이 났다.
리스본으로 들어간다. 크고 웅장하던 건물이 빼곡해지고, 조밀해진다. 이 도시는 강에 가까울수록 도시가 경쾌하고 웅장하다. 물가에서 한 발 떨어지면 시장이 보이고, 가게들이 빼곡하고 사람으로 붐비는 도심이 나타난다. 포르투갈의 찬란한 과거사는 물가에 남았지만, 현대는 뭍에 있다. 현대의 포르투갈의 모습을 벨렝 탑과 발견 기념비에서 찾기는 어렵다. 그들 스스로 제국의 지위를 버리고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킨 이들이기 때문이다. 위키를 읽다가 재밌는 인터뷰를 찾았다. 포르투갈 영화감독 페드로 코스타의 이야기다.
포르투갈은 지금은 굉장히 작은 국가인데요. 예전엔 굉장히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부분이 포르투갈의 것이었죠. 우리는 사실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인도, 아시아 일부도 발견한 국가이고요. 그리고 우리가 만들었던 식민지에 가톨릭 같은 것들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걸 잃었죠. 우리가 그것을 잃었던 이유는 잃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개발이나 아니면 세상의 다른 지역들을 탐험하는 데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작가, 시인인데요. 페소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말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걸 발견하고 정복한 이후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실업자가 되었다.” 우리는 할 일이 없어졌고요.
저녁시간이 되어 알파마 지구의 파두 하우스로 향했다. 알파마는 리스본 대성당, 28번 트램, 그리고 많은 비엔비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가파른 언덕에 빼곡한 건물, 그리고 마구잡이로 난 골목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뱃사람들과 빈자의 역사가 오래 함께 했을 곳이다.
파두는 흔히 아리랑이나 민요와 비교되곤 하는 포르투갈의 음악 장르다. 기타 연주자, 포르투갈 기타 연주자와 함께 가수가 무대에 오른다. 가수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주로 다루는 것은 운명과 체념, 한스러움과 갈망과 같은 주제인데, 이런 감정을 종합적으로 사우다드, 혹은 사우다지라고도 소개한다.
Saudade, 애정하고 그리워하는 것에 대한 사무치고 애달픈 마음, 노스탤지어와도 유사한데, 꼭 같지는 않단다. 우리나라의 한이나 정만큼 번역하기가 어렵다는 들의 고유의 정서다.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파두를 듣기 위해서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는 하는데, 나는 어쩐지 이해할 것만도 같다.
그들이 영영 갖지 못한 채 그리워하는 것이, 세계 정복의 영광이나 찬란한 역사 일리 없다. 이들이 사무치는 지점이 벨렝 탑이나 발견 기념비와 닿을 것 같지는 않다. 파두를 부른 이가 바스코 다가마나 엔리케 왕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파두는 알파마에서 시작했고, 지금도 알파마의 하우스에 있다. 떠난 사람의 간절함과 남겨진 이의 애절함, 돌아온 이의 애틋함과 다시 떠나는 허망함을 그려보며, 엄마에게 드디어 답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파두 봤어, 많이 좋더라. 부산 가서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