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수박 같은 달큼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여행만이 남는 거야
미국에 온 뒤 만난 많은 분들이 해준 말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취업 전에는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었고, 취업 후에는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었다. 미국까지 비행기 값이 얼만데, 고작 1주일만 휴가를 내서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직장인에게 1주일 이상 휴가를 내는 것은 사치였다. 나야 방학이 있었지만, 현 남편이자 전 남자친구는 직장인이었고, 2주 이상 휴가를 내려면 여름휴가나 명절 뒤에 붙여서 써야 하는데, 실상 휴가를 붙여 쓴다는 것은 직장 내에서 대단한 용기를 가져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미국에 온다는 건, 언젠가, 유럽 다음 정도로 여행을 하는....? 내 인생 여행 순위 상 5위권 내에 들지 못하는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미국에서 살게 되었고, 미국인들이 왜 해외로 여행을 가기보다는 미국 내에서 그렇게 여행을 다니는지 실제로 와보니 더 잘 알 수 있었다.
미국은 정말 큰 나라이다. 땅덩어리가 큰 나라라는 건, 결국 미국 내에서 사막, 바다, 설산 등 광활한 자연을 기후의 변화에 따라 만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근처에 뭐가 없는 우리 동네만 해도, 몇 시간만 운전해서 가면, 디카프리오의 생존 영화에 나오는 미국 불곰을 만날 수 있는 국립공원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또 몇 시간을 운전해서 내려가면 푸른빛 투명한 바다를 만날 수 있다. 또 몇 시간을 운전해서 가면 영화에 나오는 큰 도시를 만날 수 있다. 물론 그 몇 시간이 최소 4~8시간은 된다는 것이지만.
그렇다 보니 미국에 살면서 해외를 가기보다는, 미국 내의 많은 곳들을 가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하. 지금 현재 환율이 1300원대에서 떨어지지를 않고 있는 점에 착안해 볼 때, 분명 국내여행이지만, 남편과 둘이서 2박 3일 여행을 갈 경우, 호텔, 비행기, 렌트, 식비 등을 포함해 대략 2~3백만 원은 깨진다는 계산이 나왔다. 결국 어디 가든 돈이 문제.
그래도 우리 부부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필사적으로 돌아다니기 위해 짬짬이 많은 여행을 계획했다. 첫 번째는 마이애미와 키웨스트 여행. 미국 최남단 키웨스트를 차로 달려보기로 한 것이다. 100km 이상의 해안 도로가 쭉 이어지는 키웨스트는 마이애미를 방문한다면 꼭 가봐야 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워싱턴 여행. 우리 동네에서 직항으로 갈 수 있는 곳을 꼽아보자니 많지 않았고, 멀지 않으면서 여행지 내에서의 이동이 편리한 곳을 찾아야 했다. 워싱턴 여행의 최강 장점은 수많은 박물관들이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박물관들을 도보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 야경이 멋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문득,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자전소설 '침묵'에서 아이에 대해 남편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아. 여름엔 수박도 달고, 봄에는 참외도 있고, 목마를 땐 물도 달잖아. 그런 거, 다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빗소리도 듣게 하고, 눈 오는 것도 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느닷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다른 건 몰라도 여름에 수박이 달다는 것은 분명한 진실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탕처럼 부스러지는 붉은 수박의 맛을 생각하며, 웃음 끝에 나는 말을 잃고 있었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을 베어물 때, 내가 아무런 불순물 없이 그 순간을 맛보았다는 것만은.
- 한강 '침묵' 중
여행은 참,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이지만, 이후에 기억을 곱씹어 볼 때 한여름에 먹는 수박의 달큼한 맛처럼 아 그땐 참 달콤했지라고 떠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아기가 태어나고, 아기를 키우다 보면, 더 많은 돈이 들고 시간과 체력은 부족해지겠지만, 이번 여행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남편과 둘이서만 나누던 추억의 달콤함을, 아기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