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즈음에 알게 되는 것들
청소년 시절, 쉬는 시간만 되면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용의 무협지 '영웅문'을 읽으며 가슴이 두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곽정, 황용, 소용녀, 양과, 장무기 등 소설 속 주인공들이 강호를 누비며 겪는 각종 시련들을 보며 함께 마음이 아팠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청소년 시기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준 스승들은 이들이다. 삶이 복잡하게 느껴질 때마다 이들의 삶을 떠올려 보면 머릿속이 맑아지곤 했다.
무림은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글 같은 곳이지만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원리도 명확하게 적용이 되는 세계다. 악한 자는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보상을 받는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정도를 걸으며 정진하는 자는 궁극이 도를 깨닫고 새로운 경지로 나아간다.
무협지는 이십 대까지 생각이 복잡해질 때마가 내 마음을 환기시켜주는 유용한 취미였다. 일을 할 때 출구가 보이지 않아 고민이 쌓일 때마다 주인공들의 삶을 떠올려 보면 생각이 명료해졌다. 출구를 찾으려고 꼼수를 쓰기보다 내가 가진 자원과 능력을 가지고 꾸준히 정진하면 길이 보인다는 것을 그때 배울 수 있었다. 점과 점을 잇는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인 것처럼 내가 얻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고민할 시간을 줄이고 내 일에 정성을 쏟았을 때 효율도, 성과도 좋았다.
무협지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고 웹툰과 웹소설이 무협지를 대체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웹툰과 무협지는 '그림'과 '글'이라는 매체의 차이로 인해 작법도 다르고 스토리 전개의 속도도 다르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은 대충 비슷하다.
다만 웹툰은 온라인 매체의 특성상 무협지에 비해 트렌드에 더 민감하고 사람들의 '즉각적인' 선택을 받기 위해 제목이나 작품 초반에 후킹 포인트가 많다. 무협지가 작가의 세계관을 쭈욱 밀어붙이는 느낌이었다면 웹툰은 독자가 원하는 세계관을 먼저 구축하고 그 안에 작가의 메시지를 슬쩍 던져 놓는다.
그래서 웹툰을 보면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슬쩍 엿볼 수 있는데 최근 웹툰들은 무협, 로맨스, 판타지 등 장르의 구분 없이 '회귀물'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회귀물들의 스토리 전개는 대부분 비슷하다. 주인공은 어떤 계기로 현재의 기억과 능력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과거의 찌질했던 자신의 흑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나로 거듭난다는 설정이다.
웹툰의 설정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과거에 내 삶이 리셋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수많은 실수들을 내 삶에서 삭제하고 싶었다. 그런 기억들은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슬며시 존재를 뽐내며 나를 이중으로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내 삶을 리셋한 다음 깨끗한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면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너는 웹툰의 주인공처럼 회귀할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갈 거야?
하지만 얼마 전 형과의 술자리에서 형이 나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NO'였다. 대답하는 과정에서 큰 고민도 없었다. 기억과 능력을 가지고 돌아간다고 한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한 실수를 하지 않을 리도 없고 그 긴 시간을 다시 살아낼 자신도 없었다. 과거를 돌아보면 실수투성이에 후회할 일도 많이 했지만 어쨌든 나는 현재의 내 삶이 좋았다.
그래서 마흔 즈음의 나는 리셋보다 새로고침(F5)을 더 생각한다. 가끔씩 삶이 무기력해지고 사는 재미가 떨어질 때나 또다시 실수를 반복하며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그 순간을 환기시켜주면서 감정을 빨리 정리할 수 있게 도와줄 새로고침 기능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무협지나 웹툰이 나에게 새로고침 버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니 나에게 새로고침은 이것 말고도 많다. 가까운 사람들과 술 한잔 나누면서 신나게 대화할 때, 장마 이후 맑게 갠 하늘을 볼 때, 더운 여름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글 때,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회에 가서 작품을 실컷 보고 올 때, 책을 읽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문구를 발견할 때 등 정말 무수히 많은 새로고침이 나의 삶을 지켜주고 있다. 심지어 늦은 밤을 넘어 새벽이 되도록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이 괴로운 행위조차도 나에게는 소중한 새로고침이다.
삶을 리셋할 수는 없지만 새로고침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인터넷 웹페이지에서도 F5 버튼을 너무 많이 누르면 에러가 생기듯이 삶에 있어서도 과도하게 많은 새로고침은 오히려 삶의 균형을 깨트린다. 노력하되 무리하지 말고 몰입하되 몰빵하지 말자.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