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균형
디폴트 값이란 컴퓨터 분야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용어로 '기본값'을 뜻한다. 단어의 뜻만 놓고 보면 소프트웨어나 여러 컴퓨터 장치에서 사용자의 개입 없이 자동으로 할당되는 초기 설정값을 뜻한다. 스마트폰을 예로 들면 가끔 오류가 나서 초기화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설정 초기화를 하든, 공장 초기화를 하든 초기화 과정을 모두 디폴트라고 부른다. 음악 플레이어의 이퀄라이저 기능을 건드려보다가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초기화 버튼을 눌어야 하는데 이 과정 역시도 초기 디폴트 값으로 돌아간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디폴트 값은 수정이 불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계에 설정되어 있는 디폴트 값은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 이퀄라이저를 건드는 일도 나의 귀에 맞게 음질의 디폴트 값을 수정하는 것뿐이다. 단지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퀄라이저를 만지게 되면 결국 이상한 음질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보편적이고 무난한 초기 설정값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디폴트 값을 인간에게 적용해보면 도덕과 선, 정의와 같은 인류 보편적인 기준이 마련되어 있는 윤리적 디폴트 값이란 게 있다. 시대에 따라 기준이 조금씩 이동하기도 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기준이 크게 변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반면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보편적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삶에 적용을 하는 순간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거나 기준을 바꿔야 하는 경우가 꽤 많다.
삶의 기준을 잡으면서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며 살아가는 것은 그것이 꼭 '처세술'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삶의 기술이다. 문제는 엄격하게 기준을 적용해야 할 때 유연한 자세를 취한다거나 반대로 조금 기다리면서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해야 할 때 오히려 뜬금없는 원칙을 들이밀 때다. 우리는 보통 전자를 '기회주의'라고 하고 후자를 '근본주의' 정도로 대충 정의를 내린다.
나도 이십 대에 무엇인가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모 아니면 도라는 인식이 강했고 고집도 강한 편이라 잠시 근본주의자로 불린 적이 있다. 한 번 정해진 나의 디폴트 값을 수정하지 않아 발생한 일인 것 같아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디폴트 값을 수정한다는 것은 왠지 상대에게 지는 것 같고 내 자존심이 깎일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제 내 삶에 적용해보면 일을 더 재미있게 하면서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살다 보면 디폴트 값을 수정해야 할 때가 꼭 찾아온다. 그게 언제인지는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값을 수정하지 않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나와 연결된 타인의 삶까지도 매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기본'값'에 얽매이지 말고 '나'라는 사람의 기본을 잘 세워보는 것이 어떨까. 요약하면 잘 살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