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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허실 Oct 03. 2019

강남 엄마 따위

철없는 시선 | 민주주의는 언제, 어떻게 발전하는가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면 전부터 쓰기 시작한 글인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금에서야 글을 마무리하고 올린다. 철 지난 맥락의 내용이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 언젠가 생각을 정리한 후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었다.




조국의 이름이 연일 언론 지면을 도배하고 있다. 언론뿐만이 아니라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조국 이슈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매일매일 쏟아지고 있다. 대략 20일 동안 본 글들을 보고 사람들을 분류해보면 조국을 지키려는 진보, 조국을 반대하는 보수, 조국을 지키려는 진보에 실망하는 진보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쓰는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는 정치적 입장과 선택에 대한 세세한 결은 달라도 기본 방향이 비슷한 경우를 묶은 것이다.


제일 재미있는 기사는 특권 계급에 대한 글들이었다. 조국 이슈가 '계급'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것이다. 굳이 부모가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작동하는 특권 계급의 숨겨진 작동 원리가 모두 드러났고 청년들을 절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특권 계급이 판도라의 상자에 들어가 있었던 적이 있었나. 눈에 뻔히 드러나게 부정을 저질러도 온갖 편법으로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가는 특권 계급을 우리는 이미 봐도 너무 많이 봤다. 어쨌든 조국에게 실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조국이 누리는 또는 조국의 딸이 누리는 특권 의식이 있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해치기 때문에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말대로 조국이 대표적인 금수저라고 가정하고 다른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흙수저 출신으로 화려하게 정치를 하는 분이 한 분 계시다. 바로 이재명 지사다. 최근 이재명 지사가 휴가 철마다 문제가 되는 계곡 내 불법 시설들을 한 방에 정리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많은 사람들이 이재명의 그런 호쾌하고 진취적인 정책들을 좋아하고 지지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재명 지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 이들은 겉으로는 이재명 지사의 막무가내적인 정치가 불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흙수저 출신 주제에 혼자 잘난 척하려 한다는 인식이 꽤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까지 계속 이슈가 되었던 특정 연예인과 친형이 연계된 사건에서 여론이 보여준 인식이 딱 이 정도였다. 


참고로 난 법리적 해석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 그리고 요즘에 벌어지는 일들이 어디 법리적 해석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었나. 검증되지도 않은 카더라 통신류의 기사들이 언론을 도배했고 여론은 몇 개의 기사를 보고 난 후 즉각 반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궁금한 것은 평소에는 합리적인 개인들로 존재할 그들이 왜 이렇게 비합리적인 반응을 보이며 격하게 반응하냐는 거다. 도대체 왜? 


'흙수저' 이재명과 '금수저' 조국은 삶의 궤적부터 정치 스타일까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사람들이 광적으로 미워하는 모습은 묘하게 닮아있다. 전혀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에 대한 정치적 이슈들을 보며 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부분은 예전에 광우병 소고기에 대한 촛불 집회 때부터 생겨났던 작은 물음표의 연장선이다.



분명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서울의 온 동네를 촛불의 바다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소고기 정책으로 파급된 여러 가지 담론들, 그것이 괴담이든 진담이든 이제는 소고기를 먹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인식이 결국 사람들을 시청 앞으로 이끌었다.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그저 살고 싶어서 촛불을 들고 모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불안한 일이 또 있을까. 버라이어티쇼에서야 장난감 폭탄이 터지면 깜짝 놀라고 끝이겠지만 MB정부의 소고기 폭탄은 터지는 순간 비명횡사하는 꼴이니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자- 그러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시청 앞에 모이는 이유는 보다 분명해졌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아니면 더 나아가 최장집이 꺼낸 논의처럼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해서? 그런 고고하고 숭고한 이유라면 과거에 효순이 미순이 추모 집회나, 평택 미군 기지 반대 집회 때 그랬던 것처럼 기껏해야 며칠 동안 몇 천명 모이고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또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처럼 아무도 촛불을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금 솔직해지자. 사람들은 그저 죽기 싫을 뿐이다.  https://vavobox.tistory.com/97 촛불과 '촛불' 2008.6.8



내가 고등학생일 때 선배들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 학교는 두발부터 교복, 신발 등 복장에 대한 규정과 문화가 자유로워서 주변 학교 학생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곤 했는데 학교 초기에는 그렇게 자유롭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중간기사 시험 기간과 국가대항전 축구 시합이 겹친 어느 날, 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교실 TV를 틀고 축구 경기를 보니까 교사들이 학교의 모든 TV를 강제로 껐고 이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축구 경기를 보게 해 달라는 단순한 요구였는데 삼삼오오 모이더니 학교의 엄격한 복장 규정부터 불합리한 여러 학칙들을 개정하라는 요구로 이어졌다. 그래서 학교 문화가 좀 더 자유로워졌다는, 말 그대로 전설 같은 이야기인데 조금 부풀려진 부분은 있겠지만 여러 선배들에게 물어본 결과 진짜 있었던 일이었던 것은 확실했다. 


2017년 3월 10일에는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탁핸소추안이 가결되는 과정부터 탄핵이 이루어지는 동안 시민들은 매주 광화문 광장에 모여서 촛불을 들었다. 그 당시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해석이 많았지만 핍박받는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 각성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는 것이 보편적인 여론이었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 때 사람들이 모였던 이유가 정말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민들의 거대한 열망 때문이었을까.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이미 세월호 사건 때 천만 인파가 몰려나왔어야 했다. 최순실 게이트 때 사람들이 그렇게 분노했던 것은 부의 대부분을 독식하며 세상을 안하무인으로 대하는 '강남 엄마' 최순실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적인 분노가 아니었을까. '강남 엄마 따위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한 거야? 나 그런 년한테 속은 거야?' 같은 사적이지만 아주 깊은 분노로 인해 거리에 몰려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조국 대란을 대하는 자세도 어딘지 모르게 이와 비슷해 보인다. 조국을 찬성하는 입장이든 찬성하지 않는 입장이든 '민주주의'와 '공정성'이라는 거대한 명분을 들고 주장을 하지만 그 이면을 바라보면 문화적, 사회적 자본이 있는 재수 없는 강남 좌파에 대한 분노 표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보기가 어렵다. 재미있는 것은 고등학교 내 선배들이 그랬듯이 사소하지만 깊은 이런 분노들이 모여서 정말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국 대란은 어느새 검찰 개혁 촛불 집회로 이어지면서 그동안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까지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전설 같은 선배들의 이야기, 미국산 소고기 파동, 최순실 게이트, 조국 대란 등 연관성 없어 보이는 다양한 사례들을 보면서 우리가 그렇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은 어쩌면 사적인 분노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그런 작은 분노가 나를 직간접적으로 건드리는 일이 아니면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면서 어느 누군가는 울타리 밖에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적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노동자를 위한 촛불은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촛불은 아직 우리의 촛불이 되지 못했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민주주의는 언제, 어떻게 발전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불합리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개인의 사적인 분노가 임계치를 넘을 때'라고 답할 것이다. 사적인 분노라고 해서 촛불을 든 사람들의 모습이 위선적이거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언젠가는 불합리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 사적인 분노 이전에 공적인 분노가 먼저 타오를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2009년 5월 29일 故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를 마지막으로 그 이후부터 집회에는 잘 참여하지 않는 편이다. 촛불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촛불의 근거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의 조국 대란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어떤 이유로 촛불을 들던 연약한 촛불이 하나로 모여 거대한 흐름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선택은 존재하지 않듯이 나 역시 이제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선택을 할 때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불합리한 누명으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 때처럼 혹시라도 있을 불행한 죽음은 막고 싶다. 촛불을 들어야겠다.    



P.S

이번 조국 대란에서 다른 맥락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조국을 지키려는 진보에 실망하는 진보들이다. 이 분들은 페이스북에 조국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연을 끊었다던가 페친을 정리했다는 글들을 올린다. 나는 예의와 매너를 갖춘다면 어떤 입장을 이야기해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누군가를 배제하고 그걸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행동이 난 좀 불편하더라. 내가 자유한국당이든 우리공화당이든 어버이연합이든 정치적 우파를 자초하는 사람들이 싫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판단이 되면 욕하고 때리고 드러눕고 막말로 떼쓰고 우기고 배척하는 등 예의와 매너를 지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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