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공간에 정체성을 채워 넣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난 외국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십대들의 방을 볼 때마다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겼다. 도발적인 색깔의 원색 벽지부터 시작해 개성이 담긴 사진과 포스터, 희미하게 반짝이는 알전구까지 너무 매혹적이었다. 난 한 번도 그런 방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나만의 방'을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벽에 무언가 붙이려 할 때마다 주의를 줬다. 벽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고. 전셋집 세입자의 비애였다. 벽에 무언가를 붙인다거나, 나사를 박는다거나, 도배를 새로 하는 일 등은 마치 금기처럼 여겨졌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 방을 꾸미고, 공간에 정체성을 불어넣고 싶다고 생각했다.
올해 여름, 코로나 유행이 한풀 꺾였을 무렵 유럽에 방문했다.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3개국을 여행했는데 마지막 종착지였던 프랑스 니스를 제외하고 모든 도시에서 친구네 집 신세를 졌다. 가장 큰 이유는 예산의 압박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북유럽의 물가는 상상초월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집'에 머무는 행위가 호텔에 숙박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집에서 머물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신 그와 밤새도록 수다를 떨 수 있고, 집에 놓인 오브제로 그 사람의 오래된 취향을 알게 되며, 그가 살고 있는 도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스톡홀름, 오슬로, 파리에 있는 친구 집에 방문했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파리지앵 친구 F의 집에서 머물렀던 어느 날 밤이 생각난다. 파리의 집들이 으레 그렇듯 친구의 방은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빙글빙글 나선형의 계단을 쉬지 않고 올랐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들어선 방 안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살짝 닫힌 창문 틈새로 달빛이 새어 나왔고, 선반에 제멋대로 꽂혀 있는 프랑스 서적들은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그 많은 소품들 사이에서, 내 눈길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건 퀸 사이즈의 철제 침대였다. 방의 1/3을 차지하는 그 거대한 가구의 위엄은 대단했다. 혼자 사는 방에 이렇게나 큰 침대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도 잠시, 그 위에 철퍼덕 누워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퀸 사이즈 침대는 오히려 혼자 사는 사람에게 필요했다. 이 침대는 긴긴 하루 끝에 지쳐버린 나의 영혼을 포근하게 안아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싱글이나 슈퍼싱글에 누웠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온몸이 녹아버렸다. 뿐만 아니라 퀸 사이즈 침대가 있으면 친구가 집에 방문했을 때 흔쾌히 잠자리를 내어줄 수 있었다. 두 명이 누워도 비좁지 않으니까. 그때 결심했다. 자취를 시작하면 꼭 퀸 사이즈 침대를 사야겠다고.
한국에 돌아오고 얼마 안 돼 SH 임대 당첨 소식을 들었다. 작년 12월부터 쉴 새 없이 청년 주택 공고에 도전했는데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내가 입주하게 된 공간은 7평 남짓한 조그만 신축 원룸이었다. 역에서도 꽤나 멀고, 옵션으로 에어컨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행복했다. 그 모든 공간이 (당분간) 오롯이 내 것이었다. 2년 후엔 짐을 싸서 나와야겠지만 그 전까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퀸 침대를 들였다. 프랑스 친구 F의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철제 침대를. 창문 아래엔 빈 와인병을 진열해놓았다. 헬싱키에서 카우치서핑을 할 때 한 번 보고 나도 따라 해야지 싶었던 인테리어였다. 벽 쪽엔 거대한 블랙 프레임의 거울을 세워놨다. 커다란 거울은 집을 더 넓어 보이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옷을 갈아 입거나 화장을 할 때 큰 거울 앞에 서면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았다. 부엌 찬장 속엔 아이스크림 스쿱과 치즈 커터가 있다. 기분이 꿀꿀한 날엔 얼그레이 티를 따뜻하게 우려 브라운 치즈를 뿌린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함께 먹는다. 나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좋다. '자가'는 아니지만, 구석구석 나의 취향대로 꾸며져 있다. 며칠 전, 회사 동기가 집에 놀러 와 이런 말을 했다. "언니 집은 일반적인 자취방 같지가 않아. 사람 사는 집 같아." 나는 그 말이, "집 안에서 언니 색깔이 묻어 나와"라는 말처럼 들려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