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의실 PTSD
퇴근 후 굳이 집에 들러 케이크를 우걱우걱 먹고선 헬스장으로 향했다. 살을 에는 혹한기에 차마 외부 달리기는 못 하겠고 일주일에 삼 회 정도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뛰고 있다. 그토록 싫어하던 달리기가 어느덧 우리 부부의 최애 공통 취미가 되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뛸 수 없는 날엔 기분이 저조해지고 컨디션이 받쳐 주는 날은 달릴 수 있음에 그저 기쁘다. 행복이란 이토록 가깝고 단순하다.
퇴근 후 달리기는 일상에 적잖은 활력을 불어넣는다. 잘 뛰진 못 하지만 달리기 없인 못 사는 요즘이다. 그런데 지난달부터 달린 지 이십 분만 지났다 하면 알람 울리듯 요란하게 무릎 통증이 발발했다. 검색해 보니 ‘러너스 니’인지 뭔지 하는 몹쓸 증상이란다. 무릎을 살살 구슬려 가며 달리기와 빨리 걷기를 오십 분 정도 병행했다. 겨우 7km를 완주하고 나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러닝머신 맞은편 창문에 도깨비처럼 비쳤다. 누구세요? 오메. 숭해라.
아직 달리고 있는 남편에게 먼저 씻으러 간다는 신호로 엄지손가락을 척척 추켜올려 보여주고선 탈의실로 향했다. 헬스장 공용 운동복을 벗어서 탈의 수거함에 야무지게 골인. 수건과 세면도구를 꺼내기 위해 늘 사용하던 사물함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눌렀다. 삐빅. “어? 여기가 아닌가?” 양옆 사물함에서도 같은 경고음이 들려왔다. 여기 맞는데? 땀이 식으면서 급격히 체온이 내려가고 기분도 바닥으로 추락. 심지어 남의 사물함이 막 열리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걸칠 수 있는 실오라기 하나 없고 핸드폰마저 사물함 안에 보관된 상황. 여자 탈의실에 사람이라곤 나 한 명. 바깥에는 있으나 마나인 남자 직원 두 명. 발가벗고 소리칠 수도 없고 도움을 청할 길도 없고. 호달달.
찬 기운에 벌벌 떨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사물함이 이상해요.” 초면에 벌거숭이 상태로 도움을 청하는 내 꼴이 진짜 너무 숭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황하신 아주머니는 많이 춥죠? 하시며 (“어머!”라는 추임새도 쓰심. 허허.) 카운터에 다녀올 테니 잠깐 기다려 보라 하셨다. 연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기다리는데 출입문이 벌컥 열리면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놀란 나는 “악! 잠시만요.”를 외쳤다. “잠시 샤워실로 들어가 있으세요.” 구조 상 어떻게 움직여도 나의 핫바디가 훤히 보일 것만 같은데 이 상황 뭐지? 샹. 쫓기는 쥐새끼처럼 도망치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잠시 후 남자 직원이 블라블라 떠들자 아주머니가 통역사가 되어 샤워실로 오셨다. “사물함 번호가 뭐냐고 하네요?” 아. 뭐였더라. “죄송해요. 아까 그쪽 위칸 사물함인데 기억이 안 나요.”
띠띠띠딕. 삣삐삐빅. 여러 사물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이 폰이 본인 거 맞나요?” 아뇨. 흑흑.
“아이고. 나도 씻어야 하는데. 혹시 이 폰인가요?” 네! 네네네! 천사님. 그 도끼가 제 도끼입니다. 드디어 문제의 사물함이 열렸음을 안 나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이보세요. 헬스장 사장님. 벌써 두 번째예요. 제가 왜 이따위 일로 대상 받은 사람처럼 기뻐해야 하죠?
남자 직원이 물러가고 활짝 열린 사물함 앞에 선 나는 뜯지 않은 화장품 샘플을 꺼내서 아주머니께 드렸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조차도 사양하시며 얼마나 추웠냐고 위로하시는 그분은 이 시대의 진청한 천사였다. 이미 씻고 나왔을 시간이 돼서야 드디어 샤워를 시작했다.
헬스장 입구에서 만난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남편은 “아이고 고생했네. 나도 그런 적 있어서 그 사물함 다시는 안 써.”라고 했다. 마침 사물함 번호가 ‘대문자 에이 십팔번...’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해 둬야지. 만일 탈의실에서 누군가 나체로 도움을 청한다면 나 또한 오늘 만났던 천사 아주머니처럼 따뜻하게 도와줘야지. 회원님들. A -18번 사물함을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