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장아장 미니멀라이프: 페트병과 서먹서먹하게 지내기
잔잔한 오후. 홀로 거실 소파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는데 "딩동. 드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당탕 거칠게 물건이 놓이는 소리가 이어졌고 별안간 외간 남자의 쌍욕 소리가 귀에 꽂혔다. "X발. XXX이. X발."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누가 욕으로 랩을 한담?
몹시 놀란 나는 탱탱볼이 튀듯 일어나 살금살금 현관문으로 갔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문에 달린 외시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작업용 조끼를 입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왜소한 남자가 보였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진 후 시간 차를 두고 살그머니 대문을 열었다. 평화로운 오후를 박살 낸 쌍욕 소리에 손도 떨리고 심장도 두근거렸지만 몹시 궁금했다.
원인은 앞집으로 갓 배송된 생수 네 박스. OMG! 저것 때문이었구나. 우리도 자주 생수를 주문해서 마셨는데 여태 내가 마신 것은 욕이었을까, 물이었을까? 등골이 다 오싹했다. 욕을 들은 세대는 앞집이었지만 동일인물이 우리 집 생수도 배달했던 것이라면 놀랄 노 자다. 둘 곳이 마땅치 않아 많은 양을 주문했던 건 아니지만 무겁기는 마찬가지. 생수를 주문할 때면 택배 기사님의 노고에 적잖이 마음이 쓰였다. 감사하다는 글귀를 적은 포스트잇을 대문에 붙여두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근래에는 마트에서 직접 생수를 사 오거나 끓인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사 후에 정수기를 구매할 계획인지라 마실 물을 해결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미세 플라스틱의 부작용과 페트병 배출을 줄이기 위해 커피 포트로 끓인 물을 마련했는데 아무래도 물 맛이 영 아니었다. 소'물'리에인 남편은 특히나 끓인 물 마시기를 힘들어했다. 선호하는 생수 브랜드까지 떡하니 있는 남편에게 나만의 방식을 강요할 수 없는 터. 차선책으로 끓인 물에 녹차, 작두콩차 등을 우려 냉장 보관했으나 그조차도 도통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뽑기를 잘못했는지 커피 포트의 고장이 잦았다. 커피 포트는 스테인리스와 플라스틱이 섞여 있는 데다가 전선까지 달려 있어 분리수거가 어려운 물건이건만 왜 그리도 대충 만드는지 속상했다.
구매해 둔 생수가 딱 한 병이 남아있던 찰나 우연찮게 배달원의 쌍욕 소리를 듣고 여러 생각이 스쳤다. 푹푹 찌는 여름철에 무거운 생수를 배달하기가 여간 힘들고 짜증이 났을 터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거친 넋두리를 닫힌 현관문 너머로 들은 나는 생수 배달을 끓기로 더욱 결심했다. 개발, 새발, 신발 소리에 각성이 된 나는 친환경 제품인 휴대용 정수기를 곧장 구매했다.
이틀 만에 도착한 B사의 정수기. 다소 긴장되는 마음으로 개봉하여 곧장 시음까지 실시했다. 끓인 물보다는 나았지만 역시나 소물리에인 남편은 못 먹겠다고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를 위해 제품 설명서와 유튜브 동영상까지 숙지하여 친환경 정수기 이용법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웬 걸? 두 번이나 뚜껑과 필터가 대머리 벗겨지듯 시원하게 탈출하더니 기어코 사달이 났다. 다량의 물이 쏟아져 테이블과 바닥은 물바다가 되었고 교통사고를 당한 유리컵은 아이코 나 죽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주방을 나뒹굴었다. 놀란 남편이 광속도로 달려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치지 않았냐고 재차 물었다.
'나? 아니면 브리타 정수기?'
발가락을 크게 다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사고를 면한 나는 새삥 브리타 정수기에서 굵직한 금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여보. 정수기가 깨졌어." 남편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을 마신 셈이라며 씁쓸해했다. 친환경 생수 얻기 어렵다 어려워. 플라스틱과 데면데면 서먹서먹하게 지내고 싶은데 참 쉽지 않다.
미니멀라이프 야매 TIP
1. 끓인 물에 티백을 타서 냉장 보관 후 마시니 탄산음료를 덜 먹게 됩니다.
2. 친환경 정수기 사용 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뚜껑 부분을 한 손으로 고정한 후 물을 따릅시다.
3. 친환경 정수기는 결국 화병으로 사용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