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스팀세차업을 시작하고 1주 차 즈음에 있었던 일이다. 송파구에서 세차 주문이 들어왔다. 시간 맞춰 주소지에 도착하니 2층은 공사 중이고 1층 상가는 리모델링 중이었다. 그런데 1층 간판에 [OO워시]라고 쓰여있고 자동차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세차 및 자동차 외장관리숍이다.
주문이 들어온 차량은 대형 SUV로 상가 앞쪽 옆면 벽에 바짝 붙어서 주차되어 있었다. 벽 쪽에 바짝 붙어 있어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내려온 고객은 주무시다 나오셨는지 부스스한 모습으로 차를 움직여 세차할 수 있게 해 주면서 한마디를 하신다.
"전에 오셨던 분은 이렇게 붙여놔도 잘하시던데..."
"......"
느낌이 싸하다.
세차소요 시간은 차량의 오염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승용차의 경우 1시간 30분 정도면 내외부 가 마무리된다. 대형 SUV의 경우는 2시간은 잡아야 한다.
4년 전, 그때는 무서울 게 없거나, 모든 것이 무서웠던 초짜 중의 왕초짜였다. 초짜의 특징은 몇 가지로 범주화할 수 있다. 요사이 새로 창업하는 다른 지점을 보면 "아 맞다 나도 저랬었지"하고 그 점주를 이해하게 된다.
출장스팀세차 초짜의 특징은 이렇다.
-일단 열심히 한다 (잘못된 방법인지도 모르고)
-힘으로 한다 (요령 없어 무식하니까)
-오래 한다 (퀄리티를 시간으로 상쇄하려 한다.)
-고객과 눈을 맞추지 않는다 (안 잡아먹는데도)
-공정 중 한두 가지를 까먹고 안 한다 (그러나 마치고 나면 뿌듯하다)
-가끔 주문과 주문 사이의 이동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예약을 잡는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고객이 남긴 서비스 후기에 일희일비하며 마음이 몹시 흔들린다 (선플이든 악플이든)
약 2시간에 걸쳐서 대형 SUV의 세차를 마쳤다. 고객은 리모델링 중인 1층 상가를 들락거리면서 내가 세차하는 모습을 몇 번인가 힐끔힐끔 쳐다봤었다. 세차를 마치고 1층 안쪽을 쭈뼛거리며 쳐다보니 고객이 밖으로 나오며 "마치셨어요? 뭐 잘하시던데요" 하며 차로 다가와 운전석 문을 연다.
찬찬히 살펴보다가 세차타월 한 개만 달라고 한다. 그러더니 문틈새의 엣지 부분을 닦는다. 뒷문을 열고 같은 부위를 닦는다. 트렁크를 열고 올려진 트렁크 윗부분의 에지 부분과 물골을 닦는다.
나는 모든 에지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고객이 말한다.
"이 일 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아 예 죄송합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1주일 됐습니다."
"그러시군요. 평소에 세차가 취미셨나요?"
"세차하는 건 싫어하진 않았지만, 취미 삼아하진 않았습니다."
"큰일이네요. 이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좋아하지 않으면 힘들어서 오래 못하실걸요"
1층 간판에 적혀있는 [OO워시]가 떠오른다. 이 고객은 자동차 외장관리숍의 사장이었다. 20년 동안 외장관리숍을 운영하고 이번에 업종변경을 해서 [횟집]으로 바꾼다고 한다.
1주 차 얼치기 출장세차 업자와 20년 차 세차숍 업자의 만남이었다.
그것도 그냥 만남이 아니라 고객으로 만난 것이다. 그걸 알게 된 순간, 나는 내가 '송충이'가 된 것 같았다. 주름이 없는데 주름을 잡아보고자 하는 송충이! 머리가 부스스한 고객은 빛나는 황금색으로 몸의 마디마디에 굵은 주름이 잡힌 '번데기'로 보인다. 갑자기 손발이 떨리고, 얼굴이 벌게진다.
고객이 타월을 들고 자기 눈에 띄는 미흡한 부분을 닦아내며 말한다.
"아 이거 세차요금을 제가 내는 게 아니라 제가 교육비를 받아야겠는데요?"
"이렇게 하시면 차를 잘 모르는 고객은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진상 제대로 만나면 큰일 납니다."
"제가 20년 하던 가게를 접는 것도 진상 때문이에요.
아무리 잘해도 그런 사람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횟집으로 바꾸는 겁니다."
"이제 시작하셨으니 배우면서 하시면 됩니다. 그전에 이 일을 좋아하셔야 돼요.
배우신건 바로 적용하시고, 틀리면 좀 바꾸시고......"
"그런데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네, 교육업체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왜 그만두셨어요?"
"네, 다니던 회사가... 대표가... 상사가... 비전이... 미래가..."(좋소 기업의 특징을 늘어놓았다.)
"저라면 제가 20년 다닌 회사를 그렇게 말하진 않겠습니다. 어디 가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저하고 연배도 비슷하신 거 같으신데 그러시면 안 돼요"
완전 KO패다. 콜드 패다. 기술도, 노력도, 인성도, 사회성 모든 부문에서 완패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즈음의 나는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했었다. 2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새 일을 시작한 지 1주일 차였으니... 불안하고 답답하고 그런 때였다. - 그러나 내가 생각해도 나란 놈은 정말 모자랐다.
교육회사를 다닐 때 회원이 새로 가입하면 '입회'라고 하고, 그만두면 '휴회'라고 한다. 입회를 할 때 코드를 부여한다. 코드의 내용은 다른 학부모에게 소개를 받았는지, 광고를 보고 신청했는지, 그만두었다가 다시 하는 건지, 거리에서 시행하는 무료진단 테스트를 통해 가입했는지, 그 외 기타인지다.
휴회를 할 때도 코드를 부여한다. 싫증이 났는지, 효과가 없었는지, 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민을 가는지, 질병인지, 기타인지. 이때 주목할 것은 기타다. 기타는 보기를 든 것 이외의 것을 말한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도 한다.
"이런 게 불만입니다. 그래서 그만둡니다"라고 말해주는 고객은 고마운 고객이다.
기회를 주는 거다. 그걸 고치면 다시 하겠다고 말을 거는 거다.
그 고객이 다시 하지 않더라도 아픈 경험이 데이터 베이스에 쌓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해 준다.
진상 때문에 횟집으로 업종변경을 한다는 그 고객은 나와 동갑이었다. 20년간 서로 다른 일을 했다. 직접 갖다 대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보다 더 큰 번데기... 아니 사람으로 보였다.
2시간 동안 내가 세차한 차량을 다시 한번 타월을 들고 닦아나가는 고객을 따라다니며 교육을 받았다. 쪽팔림과 낯뜨거움을 무릅쓰고 새겨가며 들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때의 만남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깨달음이란 게 사실 별거 없다. 세상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한다.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한 것들, 사소해 보이거나 당장 잇속이 보이지 않아 생략한 것들이 사실은 정말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