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다름의 시작, 타입
휴먼 디자인은 그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흥미로운 탐험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다.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생명은 어떤 과정으로 잉태되는지, 죽음은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지, 무의식의 실체는 무엇인지 등 생각만 해도 벅찰 정도다. 휴먼 디자인은 이토록 놀랍도록 방대한 지식을 놀랍고도 정교한 논리로 이 우주와 간의 작동 메커니즘(mechanism)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이 방대한 양의 정보를 통해 세상과 우리 인간이 특정하게 설정되고 한계 지어진 특정 메커니즘에 의해서 작동된다는 것에 깊은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각 개인은 자신만의 고유한 전략(strategy)과 내부 권위(inner authority)에 항복(surrender) 해야 한다는 사실에 누구나 예외 없이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휴먼 디자인을 통해 아무리 수많은 개념과 정보들을 접하게 되더라도 결국 한결같이 귀결되는 곳은 항상 전략(strategy)과 내부 권위(inner authority)다.
결국 우리는 휴먼 디자인의 최핵심 개념이자 인생의 고유한 전략이 담겨 있는 '타입( type)'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는 인생전략이 '타입'에서 나오기 때문이고, 타입 역시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아우라(aura)'의 독특한 특질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타입'은 대략 사람이 양팔을 벌린 너비의 2배 정도의 크기로 우리 몸에서 내뿜어지는 전자기적 주파수(electromagnetic frequency)인 아우라(aura)의 특질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아우라의 특질에 따라서 매니페스터(manifestor), 제너레이터(generator), 프로젝터(projector), 리플렉터(reflector)의 4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 4가지 타입(Type)
(1) 매니페스터(manifestor)
매니페스터는 닫혀있고(closed) 밀쳐내는(repelling) 아우라를 갖고 있다. 말 그대로 다른 이의 아우라를 배척하는 단단한 아우라다. 이로 인해 다른 이들의 전체 아우라를 수용, 경험하거나 이해할 수 없고, 정작 자신이 외부에 어떠한 임팩트를 끼치는지 알지 못한다.매니페스터의 아우라는 불도저처럼 밖으로 쭉쭉 뻗어나가며 일을 벌이고(manifesting) 시작하며 주도하는 에너지다. 이는 처음에 수용하기 무척 힘들었던 내가 갖고 있는 아우라기도 하다.
(2) 제너레이터(generator)
제너레이터는 열려있고(open) 감싸는(enveloping) 아우라를 갖고 있다. 다른 생명력에 열려 있고 지구 상의 모든 것을 감싸면서 이들의 아우라로 주위 사람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이 아우라는 주위 공간을 지배하는 엄청나게 강한 생성장(generated field)을 만들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제너레이터가 생성한 세상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제너레이터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조건화시키면서 또한 열려있는 속성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에너지를 무조건적으로 흡수하므로 조건화에 취약하다.
(3) 프로젝터(projector)
프로젝터는 집중하고(focused) 흡수하는(absorbing) 아우라를 갖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탐색하고 관통하는 비범한 아우라다. 종종 사람들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생명력을 흡수하고 인식함으로써 본성과 존재를 꿰뚫어 본다. 올바른 질문을 던져서 에너지 유형의 사람들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리드하는 타고난 가이드다.
(4) 리플렉터(reflector)
리플렉터는 저항하고(resistant) 샘플링하는(sampling) 아우라를 갖고 있다. 아무것도 들러붙지 않는 테플론(teflon)과 같은 아우라다. 다른 이의 아우라와 프로그램 주파수를 샘플링해서 누구도 볼 수 없는 현상을 탁월하게 식별할 수 있는 판별자다. 외부로부터 오는 조건화에 자체적으로 저항하여 주변의 모든 생명력을 똑같이 반영함으로써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프로그램이 어떻게 생명력을 조작하는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탄광속 유해가스를 감지하는 카나리아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렇게 타입을 결정짓는 아우라(aura)는 심장이니 영혼이니 하는 이런 것과는 관련이 없다. 내가 어떤 심리 상태인지 내가 어떠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와도 관련이 없다.
아우라는 태어날 때부터 내 몸에 붙어있는 껍질처럼 작동하는 그냥 그런 것이다. 우리는 내 몸에 있는 껍질이 작동하는 한계를 인정해야 할 뿐, 이것에 대해 우리가 어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닫혀있고(closed) 밀쳐내는(repelling) 아우라를 지닌 매니페스터는,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미리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알게 하는 '알림(informing)'을 통해 주변에 '영향력(impact)'을 끼치면서 단단한 껍질 속에서 '평화(peace)'롭게 존재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요청하거나 시키는 것을 수동적으로 하면서 주도하지 못하게 되면 '격한 분노(anger)'를 경험하게 된다.
열려있고(open) 감싸는(enveloping) 아우라를 지닌 제너레이터는, 천골의 '반응(responding)'을 따르는 과정에서 느끼는 '만족(satisfaction)'이 행복의 열쇠다. 만일 반응에 응답하지 않고 무언가를 먼저 시작하거나 조급하게 뛰어든다면 천골의 에너지가 고착되면서 '좌절(frustration)'을 경험하게 된다.
집중하고(focused) 흡수하는(absorbing) 아우라를 지닌 프로젝터는,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인정'해주는 올바른 사람들의 '초대(invitation)'를 기다림으로써 '성공(success)'의 단맛을 맛볼 수 있다. 만일 초대를 기다리지 않고 무언가를 먼저 하려 한다면 '씁쓸함(bitterness)'을 느끼게 된다.
저항하고(resistant) 샘플링하는(sampling) 아우라를 지닌 리플렉터는, '달의 주기(28.5일)'를 기다리면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삶의 '경이로움(surprise)'을 느낀다. 만일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외부 조건화를 그대로 흡수한다면 삶의 놀라움 대신 계속되는 '실망(disappointment)'을 경험하게 된다.
아우라의 특질을 기준으로 인간을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한 것은 정말이지 놀랍다. 게다가 앞서 설명한 4가지 타입 중 '프로젝터' 타입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젝터 타입은 1781년 천왕성이 발견되고 7개 센터 인간에서 9개 센터 인간으로 변모하면서 갑자기 출현한 유형이다.
실제로 휴먼 디자인을 접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 아우라의 독특한 실체를 인식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타입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아우라의 작동방식을 존중하게 되면 아우라 문제(aura problem)로 인해 겪었던 심리적, 신체적인 고통이 곧바로 해소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아우라의 기계적 과정을 방해할 때 삶이 혼란, 혼돈,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아우라가 건강하게 작동하면 신체적으로도 건강하게 된다. 아우라가 바로 몸이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우라는 우리 몸에서 기계적으로 방사되는 생체 에너지로 우리는 이 아우라에 탑승한 것이 승객(passenger) 이다. 즉 승객이 타고 있는 몸의 성질이 바로 아우라다.
그리고 승객은 이 몸의 메커니즘을 체험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이렇게 아우라 작동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게 되면 더 이상 기존의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아우라는 우리의 생명 에너지가 그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우리 '존재'의 진정한 표면을 표현한다. 즉 타입으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존재의 방식'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러한 '존재의 방식'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보면 타입(type)은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틀을 제공한다. 한 마디로 인간을 새롭게 재정의하는 획기적인 틀인 것이다.
따라서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아우라'를 이해한다는 것이고, 성공적인 관계 역시 타입 간 아우라의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으로 바라보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다름(differentiation)'이 있고 '다름'에 따른 '올바름'이 있을 뿐, 더 이상의 불필요한 비교는 필요가 없다. 이 '다름'이 과연 어느 수준까지 고유하게 다를 수 있는지 파헤치면, 일란성쌍둥이마저도 유전자적 수준에서 지구 상에 똑같은 디자인은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 옳은 길, 그른 길은 없다. 그저 나의 길, 당신의 길, 나에게 완벽한 길, 당신에게 완벽한 길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너와의 비교가 아닌, '다름'에 따른 '올바름'을 배워나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가 얼마나 다르고 독특한 존재인지를 수용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할 본래 목적에 맞게 자신을 놓아줄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름의 시작은 바로, 타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