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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미 Dec 20. 2019

탈코르셋 운동에 강제성이 동반되는 이유

이민경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

지난 5월 중순부터 탈코르셋을 해왔다. 화장하지 않은 채 출근하고 일상을 보낸 게 7개월 되었다는 뜻이다. 헤아려보니 외출할 때 피부화장을 하지 않은 적이 스무 살 이후로는 거의 없었다. 탈코르셋 운동 흐름을 알고 있었지만 선뜻 수행하지 못하다가 화장을 하지 않게 된 건 ‘외부의 강제성’ 때문이었다. 옆에서 강권하는 페미니스트 친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접촉성 피부염으로 찾은 피부과 전문의가 “나을 때까지 화장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통영에 출장을 다녀왔는데 바닷바람을 맞고 나서 오른쪽 뺨에 오돌토돌한 것들이 올라왔었다) 경험자로서 말하면 탈코르셋 운동에서 약간의 강제성이 동반되는 건 당연하다. 여성들이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화장하지 않기로 결정하기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꾸미지 않았을 때 겪는 경험은 그저 성가신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실패로 느끼게 하는 처벌이기 때문이다.”(이민경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 72p)

꾸밈이 ‘정상값’이 되어버리면 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비정상적이고 감추고 싶은 무언가가 된다. 지난해 가을 접촉성 피부염을 동일하게 앓은 적 있다.(이때엔 속초 바닷바람으로 발병했다) 당시에도 피부과전문의가 화장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땐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끼고 출근했다. 책에 등장하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여고생의 이야기가 몇 달 전까지 내 이야기였다. 얼른 낫고 싶었다. 화장하고 싶어서였다. 화장을 좋아하지 않고 뛰어난 화장술을 펼칠 재주도 없는 내가 말이다. 그만큼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부끄러웠다.


탈코르셋을 부르짖어도 미디어나 길거리 광고판에 전시된 여성상은 화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 넷페미 진영에서 탈코르셋을 무조건 긍정하고, 때론 강요하는 흐름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탈코한 여성들이 그 과정을 전시하고 공유해야만, 다른 여성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도 지난해에 실행하지 못했던 탈코르셋을 올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회사에 화장하지 않는 여성이 많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다. 특히 한 선배는 입사 이래 줄곧 숏컷과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나도 화장하지 말고 회사에 가볼까?’라고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그 선배였다. 화장하지 않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온라인의 탈코 운동은 물론이고, 가까이 현실에서 볼 수 있었던 화장하지 않는 여성들 덕분이었다.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자는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무수한 수행으로 채워진 좁은 영토 안의 규범을 이탈해 결국 또 다른 억압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자주 나오고 있다. '탈코르셋이 역코르셋', 즉 '억압을 벗자는 탈코르셋도 결국 또 다른 코르셋'이라는 말로 설명된다.(같은 책, 72)

“소수자에 의해 다수자가 억압받는다거나, 차별 해소 조치에 대해 역차별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성립할 수 없듯이 탈코르셋이 역코르셋일 수 없다.”(같은 책, 72-73)

탈코르셋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탈코르셋이 억압이라는 시선이다. 많은 남성들이나 탈코하지 않은 여성들이 이런 오해를 한다. 하지만 탈코르셋은 무조건적인 자유이다. 탈코르셋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이동성을 되찾는 과정이다. 몸을 건강히 하는 것이며 손쉽게 여성의 외모를 지적하는 온갖 사회적 억압을 가뿐히 무시해버리는 운동이다. “화장하지 않아서 피곤해 보인다”는 말이 얼마나 일순간에 여성을 무너뜨려 왔는가. 한국 여성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여 스스로를 점검했는가.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이란 친밀한 가족일 수도 있고 길거리에서 지나쳐갈 사람일 수도 있다. 여성을 평가하는 타인의 스펙트럼은 그만큼 넓고 어디에나 존재한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삶이 간명하고 자유로워진다. 내게 탈코르셋은 아침에 미처 화장하지 못해서 급하게 택시에 타, 화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여유 있게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점심을 먹고 화장을 고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 퇴근 후 운동하러 가서는 가볍게 세수만 하면 되니 공연히 화장을 입혔다 지웠다 할 필요가 없다. 화장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모을 수 있다. 내 몸을 사회적 기준에 맞춰 점검하는 대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을 쓴 이민경 작가는 전작에서 그러했듯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헷갈리는 시점에 혜안으로 가득한 책을 펴냈다.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은 탈코르셋 개념을 꼼꼼히 설명한 뒤 탈코에 대한 사회적 오해를 시원하게 깨부순다. 그리고는 여성의 운동(땀 흘리는 그 운동!)과 경제권 등 여러 갈래로 사유를 넓혀 간다. 전작 입트페에서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신나게 논리를 펼치던 이민경 작가는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에서는 100여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작가 자신도 변해갔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팔짱을 낀 채, 한국 넷페미들의 탈코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다면(“한국 페미들이 잘못 가고 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etc.)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탈코를 망설이는 사람들도.



덧1. “아름다움은 복잡한 존재며, 언제나 인간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큰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리네이 엥겔른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름다움 일반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다양한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긍정하기 어렵네요.


2. “오늘날 상식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화를 하자면서 '여자는 당연히 차별을 받아야지 무슨 소리냐'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솔직하게 무식한 소리를 하면 차라리 거르기나 쉽습니다. 어려운 건 점잖은 말투로 '우리 사회에 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건 인정하지만 네가 말하는 건 차별이라고 볼 수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입니다. 더 위험한 건 앞에서도 말했지만 '근데 나는 잘 모르겠던데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공기처럼 존재하는 차별이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이 아예 없거나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차별의 존재 여부를 결정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인 입으로 인정했듯 차별은 당신이 알고 상대는 모릅니다. 당신이 흑인이 아닌데 흑인이 겪는 차별을 알고 싶다면 백인에게 들어야 합니까, 흑인에게 들어야 합니까? 또, 그 경중은 누가 정해야 합니까?"(『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작가가 전작 입트페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그러나 시원하게 논리를 펼칠 때도 너무 좋았습니다.


덧3. 이민경 작가가 최근 레나트 클라인의 『대리모 같은 소리』를 번역해서 내놓았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겁고 부지런한 작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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