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필요성
상담실에는 학교를 그만 다니고 싶다는 학생들도 찾아옵니다. 뉴스에는 왕따나 학교폭력의 괴롭힘 때문에 못 견뎌 자퇴를 하는 사례를 많이 보죠.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구요. 학교를 왜 다녀야하는지 모르겠다는 친구들이 더 많습니다. 교사에게 중고등학교를 중퇴하는 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상담을 합니다.
학교를 나오겠다는 내담학생들 말을 들어보면 더 고민이 깊어집니다. 이들이 하는 말이 틀린 건 없거든요. 미용을 하고 싶고, 식당이나 카페를 운영하고 싶은데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들은 자기 관심사와 무관하다는 거에요. 우리가 학교에서 직업 기술을 배우진 않잖아요. 하루종일 국어, 영어, 수학같이 정말 살면서 가장 쓸데없어 보이는 걸 공부하죠. 아마 여러분도 공부가 괴로울 때 수 없이 생각했을 거에요. 글씨를 읽고 셈 하는 법은 이미 초등학교 때 다 익혔고 그것만 알면 사는데 지장 없을 거 같다구요.
학생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이 들면 자연히 시간이 아까워요. 중고등학교 6년의 시간은 너무 길어요. 그 시간 동안 바리스타 수련을 하면, 미용을 연습하면 경쟁자들에 비해 앞서가리라는 마음에 조급해지죠. 거기에 ‘나는 공부에 재능이 없다’라는 인식도 하거든요. 이쯤되면 자퇴를 안 하는게 이상해죠. 좋은 대학에 가지도 못할 텐데 인생을 낭비한다고 여기면서요.
그런데 진로이론에서는 진로정체감 유예를 진로정체감 유실에 비해 건강한 상태로 봅니다. 충분히 탐색하지 않고 자기가 고른 진로에 매진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당장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진로를 찾아보는게 나아요. 학교는 탐색의 기회를 제공하는 요람 같은 곳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언어, 수학, 사회, 과학은 기초학문입니다. 실생활에 필요한 개념으로 가공하기 전까지는 직접 사용되지는 않는 지식입니다. 청소년의 입장에서는 필요없다고 생각할 만 합니다. 이런 지식들은 대학에 가거나 직장에 가면 응용해서 생산적인 일에 쓰이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만든 모든 정보는 언어로 쓰여 있습니다. 글씨를 아는것과, 글을 이해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심리학 개론서나 법전을 읽을 수 있나요? 고등학교 3학년 수준의 국어실력이 되어야 대학교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뿐 아니라 표현에도 언어실력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을 정확히 주장하려면 어휘력과 문법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지요.
인간이 만든 정보 중 무슨 언어로 된 자료가 가장 많을까요? 바로 영어입니다. 제가 전공한 심리학만 해도 거의 모든 이론의 원본은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일겁니다. 학문 뿐인가요? 기계 사용 매뉴얼에서부터 영화, 드라마같은 매체까지 영어의 영향력은 압도적입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강조해서 가르치죠.
국어, 영어는 그렇다 치고 수학은요?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언어가 바로 수입니다. 높은 빌딩에서 물체가 떨어지는 속도,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 화학반응이 일어나는데 필요한 물질의 양까지 숫자를 쓰지 않으면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사칙연산만으로는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복잡한 공식과 이론을 수학자들이 개발한 것이죠. 수 백년 전만 해도 천재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미적분법을 지금은 고등학생들도 노력하면 쓸 수 있는 게 이 수학자들 덕이죠.
언어. 수학, 사회, 과학 등은 익히기가 어렵습니다. 매우 고급스러운 도구에요. 10대에 하지 않으면 나중에 2, 30대에 다시 배우려면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런 기회를 잡는 것 자체가 어렵구요. 그래서 배움에는 때가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무료로 배우잖아요. 골치 아프다고 불평도 해 가면서 말이죠.
얼른 자퇴하고 자기가 계획한 일을 하겠다며 마음이 조급한 학생들을 저는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그 친구들은 최대한 빨리 목표직업을 골라서 남들보다 먼저 연습을 시작해야 경쟁에서 이긴다고 믿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직업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덕목들은 많이 겹칩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미래직업과 무관한 것이 아니에요. 언어능력, 논리력, 공간지각력, 예술적 감각 등 다양한 적성들이 있는데, 이걸 각각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니까요.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길이 하나 뿐이고 자퇴해야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것도 인생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정도의 확신이 없다면 일단 그 자리에 머물러 보세요. 좀 천천히 가도 괜찮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는, 지금 여러분 나이에 가장 가치있는 배움을 제공하는 곳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