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내게 위로 06화

오물을 뒤집어쓰기

서열 2위라 착각하는 3위

by 낙유

우리 집 자칭 서열 1위는 나다. 그러나 실질적인 서열 1위는 와이프님이 되시고, 서열 2위로 착각하는 5살 딸아이가 있다. 우리 아이가 생각하는 서열 1위는 다행히도 아빠다. 기특한 녀석.

어제 와이프에게 유치원 선생님 전화가 왔단다. 무슨 일이 있어서는 아니고 정기적으로 아이 발달이나 적응 등에 관하여 설명해 주시는 거다. 요즘 들어 아이는 집에서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나 그럼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올 거야~??' 하고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우는가 하면, 집에서 소리지르기, 엄마를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하는 등 갑질을 일삼고 있다. 이 만행을 선생님께 고하였더니 깜짝 놀라시며 유치원에서는 밥도 남기지 않고 잘 먹고 친구들이 싸울 때 중재도 하며 매우 모범적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하셨단다. 천만다행이기는 하나 이런 배신감이 없다. 집에서는 밥 안 먹기, 안 씻기, 소리지르기, 떼쓰기 등 엄마 아빠 열불 나게 하는 1등 공신 이건만 이런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니.

나름의 사회생활을 잘해 나가고 있어 기특하긴 하다만 집에서의 서열을 확실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엄마한테 소리 지르는 것은 눈앞에서 보기가 힘들다. 와이프는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대부분 큰소리 내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하면서 받아주는 편이다. 아이는 이를 본능적으로 이용하여 엄마를 통제하려 한다. 엄마가 제 마음대로 해주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소리지르기와 떼쓰기가 시작된다. 나이만 5살이지 빛을 본 지 44개월 밖에 되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는 얘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이성보다는 본능이 더 강하다 생각되어 대화보다는 본능을 자극하는 훈육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며칠 전 씻지 않겠다고 떼쓰며 엄마에게 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 싫다는 아이를 방으로 들고 와 엄마와 분리시키고 아이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엄마한테 소리 질러! 엄마 아빠는 소리 못 질러서 조용히 말하는 줄 알아~!? 어디서 떼쓰고 있어~!!'

'아빠도 엄마한테 소리 안 지르는데 누가 버릇없이 엄마한테 소리를 질러!'


눈이 동그랗게 커진 아이는 눈물을 뚝 그치더니 상황 파악이 된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선 바로 잠이 들었다. 결국 씻지 않겠다는 목적은 달성. 또 당했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깨끗한 것만 쥐어주고 사랑으로만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훈육이라는 명목 아래 매몰차게 대하는 게 마음이 아프다. 백옥 같은 몸에 스스로 자처하여 오물을 뒤집어쓴 채로 걸어 다니는 것만 같은, 조용한 관객이 되어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무대로 끌려 나와 광대가 된 듯한 기분. 아마 우리 부모님들 모두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새끼를 위해 맞지 않는 옷 입어가며 그렇게 키워 냈으리라. 그래서 이만큼 사람 구실 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아이가 세상살이 만만치 않음을 느껴 스스로 생각하고 노력할 수 있는 사람.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도움이 되는, 맑은 영혼을 가지며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그때마다 이 아비도 할미가 그랬던 것처럼 오물을 뒤집어쓰고 악역을 자처하리라.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해 주길 바란다 아가.


다음날이 되자 떼쓰기는 눈에 띄게 줄었다. 서열 정리가 된 듯하다. 아빠가 1등, 엄마가 사실은 1등, 아이가 3등. 아이는 여전히 아빠가 1등인 줄로만 알고 있다. 고마운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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