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서라도 쉬셔야 하니까 힘 빼시고 최대한 편하게 앉아만 계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맡기시면 됩니다."
"아, 네..(웃음)"
야근을 해야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도저히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퇴근 직전에 미용실을 예약하고 부랴부랴 달렸다. 덥수룩해진 머리로 시골에 가서 추석을 지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미용실에 들어서고 환영 인사는 받았는데 답할 시간도 없이 예약자가 맞는지 확인을 하신다. 피곤한 상태에 시간을 맞추려 뛰기까지 해서 어지럽고 숨이 차니 훅 들어오는 질문 세례에 더 정신이 없다.
미리 예약 전화를 했을 때, 원래 내 커트를 담당해 주시는 디자이너께서는 오늘 쉬시는 날이라 다른 디자이너가 머리를 해도 괜찮냐고 물으신다. 하지만 애초에 머리에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어떤 디자이너도 문제없다. 그동안 담당 디자이너가 바뀌지 않은 이유는 그 미용실에서 처음 내 머리를 커트해 주신 분이었고 그때부터 미용실에 내 담당으로 지정이 되어서다. 그리고 예약할 때마다 계셨기 때문이다.
오늘 머리를 커트해 주실 분은 남자 디자이너이시다. 처음 마주 하자마자 피곤해 보인다고, 눈이 충혈되었다고 하시는데 내가 볼 때는 그분도 만만치 않으셨다. 눈의 초점은 흐렸고 짙은 쌍꺼풀이 생겨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눈꺼풀을 겨우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사색을 즐기는 나에게 자꾸 이런저런 말을 시키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닌데 녹초가 된 상태에서 편히 앉아만 있으라는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낚싯배에서도 커트를 해봤다고 하셔서 정말 잠들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낚싯배 고객의 머리스타일은 무사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몸은 천근만근이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동병상련이었을까, 나는 대충 하고 얼른 각자 집으로 퇴근하자 말하고 싶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기를 몇 분, 눈썹과 얼굴에 잔털 정리를 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신다. 항상 그렇듯 미용실에서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은 '좋습니다.'이다. 거울에 비치는 나보다 전문가의 감각과 기술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스타일을 추천해 주시는데 그때마다 그럭저럭 마음에 들기도 했다.
눈썹 정리하면 고등학생 때의 일이 떠오른다. 대학을 다니는 누나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누워서 수다를 떨곤 했는데 갑자기 작은누나가 내 눈썹을 보더니 깔끔하게 정리를 해 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에 읽었던 삼국지에서 하후돈이 눈에 맞은 화살과 눈알을 빼서 '부모님께 받은 것을 버릴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눈알을 먹어버렸다는 이야기가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때부터 있는 그대로인 자연스러움을소중히 하고, 이것이 진정한 멋과 아름다움이라고 여겼기에 눈썹 정리 제안을 한사코 거부했다. 또한, 눈썹을 거의 다 밀어버린 큰누나가 엄마에게 호되게 혼났던 모습을 봤기 때문에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누나의 집념은 나보다 더 컸기에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온 신경이 곤두서서 칼날 면도기처럼 생긴 녀석이 '슥슥'대며 나를 긁을 때마다 오버하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다 끝난 후에 거울을 보니 눈썹 주위가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깔끔해진 얼굴에 상당히 만족해했고, 누나도 어깨를 으쓱하며 흡족해했던 기억이 난다. 제주도에 있어 자주 볼 수 없는 누나인데 곧 조카까지 태어난다 하니 오늘따라 더 보고 싶은 누나다.
헤어디자이너들이 하루 종일 편히 앉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독한 약품도 만지고, 빗과 가위질로 쉴 새 없이 움직이니 손가락과 손목이 많이 아프다는 고충을 들은 적이 있다.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게 우리 몸과 마음인데헤어디자이너 또한제때 회복하지 못하면 병이 드는 극한직업이다. 게다가 손님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 말 상대도 되어야 하고 정성을 다한 머리가 맘에 안 든다는 손님의 불평과 불만을 다 들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요구사항도 없고 어떠냐는 물음에 좋다는 말만 연발하는 내가 최고의 손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받은 위로의 보답은 까다롭지 않은 것으로 대신하면 괜찮을까.
진정한 프로는 그때그때의 컨디션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 손님을 배려하며 건네신 따듯한 말 한마디에 이렇게 큰 위안을 받게 될 줄이야.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든 하루를 보내셨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평일 어느 저녁날, 식사도 하지 못한 채 모두가 지치고 힘든 이 시간. 마지막 손님에게까지 첫 손님과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진정한 프로를 눈앞에 마주했다. 유독 오늘만? 또는 손님이 나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처음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미용실에 오는 손님의 생각과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미용 기술은 차치하고 나름대로의 손님을 대하는 철학이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 누구에게 위로를 주었는지, 컨디션에 따라 부담과 불편함만을 준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 철학은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미용실에 앉아서 곰곰이 돌아보고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