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이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닌 타인에게 보임을 의식하며 외부 시선에 나를 맞추는 삶이다. 타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 말로 가면을 쓴 사람이다. 그러나 그날의 컨디션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심리상태와 행동 등을 가면을 썼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고 다양한 내면이나 잘 발달한 사회성에 가깝다.
영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처럼 역할을 강요당하는 삶 또는 타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내면의 자아와 요구받는 자아 사이에 갈등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스스로 행복을 만들기가 어렵고 특출 난 성과를 보여주거나, 외부의 관심 또는 부러움을 살 때 행복과 만족을 느끼기에 이것들이 사라진다면 정체성도 무너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된다. 겉으론 화려하나 속은 공허한 것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집에서 화려한 파티를 연 후, 모두가 떠난 빈 집에 홀로 남아 흐느끼는 장면이 이와 같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유명인들도 가면을 쓰고 있다. 영화, 드라마, 광고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를 실제 모습으로 착각한 대중들이 그 모습을 계속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관심이 곧 돈이자 명예이자 행복이기에 일상생활에서도 그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지 관리를 못해 말실수나 경솔함을 사과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고 실수 또는 경솔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면을 벗은 진짜 모습일 수 있음에도 말이다. 유명인들이 사생활의 노출을 꺼리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모습의 괴리감을 대중들이 느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사생활을 감춰 가면을 벗어야 안정적으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벼워 보이지 않으려 했고 감정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척 애썼다. 논리적으로 보이려 말했고 모순을 감추려 포장했다.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인정욕구가 자리 잡고 있었고, 반대 의견이나 조언을 온전히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등 실패의 불안감이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품위 있는 모습을 보이며 식사를 하려 하지만 수저와 포크를 떨어뜨려 주변의 불편한 관심을 받는 실수를 반복한다. 그리고 입 주변에 스파게티 소스가 멀리서도 잘 보일 만큼 묻은 줄 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표정으로 식사를 한다. 주변에 비싼 옷을 입고 편하게 식사를 하는 다른 손님들과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혹시라도 나를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볼까 봐.
대화 중에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이 있으면 억지로라도 다른 논리를 가져와 합리화하려 한다. 그리고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빨라지는 심장박동과 함께 얼굴이 상기되고 목소리가 커지며, 내 논리를 방어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사고로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씩씩대는 숨소리만 들린다. 시야는 흐려지고 남은 건 감추기 힘든 분노뿐이다. 무시하고 틀렸다고 할까 봐서.
업무 보고를 앞두고 혹시라도 부족한 내용이나 실수한 부분이 있을까 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며칠째 불안에 떨고 있다. 보고서를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치지만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다. 질문을 받았는데 답을 못할까 봐, 더 나은 대안을 찾지 못했다고 하시지는 않을까, 더 창의적인 내용으로 다시 작성하라고 하지는 않을까. 걱정과 걱정이 꼬리를 물고 물어 끝이 없다. 업무 보고로 자신의 부족한 점이 드러나지 않을까, 혹시라도 부정적인 인상을 주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눈에 의해 보여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보여지는지가 아닌, 때와 장소에 따라 어떤 내가 드러나는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주말에 집에서 쉬다가 잠깐 편의점에 갈 때 운동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쓰고 가는 게 자연스러운 법이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은 내가 원해서가 아닌 타인의 자의적인 마음이기에 내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인정받기 위함이 아닌 나의 성취와 발전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타인의 인정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고급레스토랑에서 품위 있는 식사를 하려거든 그에 맞는 분위기를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싼 티 나는 모습을 보일까 봐 전전긍긍할게 아니라, 적당히 그 분위기에 맞는 품위를 갖추는 것이다. 당연히 연습이 필요하다. 레스토랑에 여러 번 가 볼 수도 있고, 집에서 연습하거나 이미지트레이닝을 하는 것도 좋다. 우리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으니 집에서 연습하는 것이 좋겠다.
의견을 나누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보다 더 나은 의견에 도달하는 것이다. 흔히 격한 토론이나 논쟁은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내 의견과 타인의 의견에 서로의 생각들을 더하여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토론이나 논쟁은 상대방 논리의 허점을 공격하고 내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이다. 또한 의견 대립에서 자신의 감정이 격해진다는 것은(지나친 긴장감에서 오는 감정의 격함이 아님) 토론이나 논쟁이 내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는 내가 할 말이 없으므로 상대의 의견에 공감을 표할 신호임을 인지해야 한다.
완벽한 업무 보고는 없다. 업무를 보고하는 사람과 보고를 받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업무 보고 지시를 한 후 보고를 받기까지의 사이에 회사 방침이 바뀐다거나, 외부로부터의 문제점이나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그러나 보고자는 이러한 새로운 정보의 접근이 제한적이므로 업무 보고를 받는 사람에게 100% 만족을 주기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직위를 막론하고 보고자는 정보력에서 취약한 을의 입장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그러니 빈틈이 없는 보고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면 된다.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하다. 이는 곧 실수가 되고 스스로도 견디기 힘든 도망치고 싶은 상황의 연속이다. 무지를 인정하지 못한다. 순간의 모면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긴장을 덜 하고 자연스럽다. 실수를 하더라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할 수 있고 더 알아가려는 의지가 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타인은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 오직 나만이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다. 게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도 않고, 그 시간마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타인을 위해 내 시간을 낭비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나와의 수많은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해야 한다. 그럼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