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을 마치고 축구에 목말라 있는 내게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당시에는 작은 누나의 친구였고, 지금은 둘째 매형인 형님이 누나를 통해 조기축구회에 나올 생각이 있는지 물어 왔다. 오랫동안 누나와 가까이 지내던 형이었기에 나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나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난생처음 조기축구회에 가입했다.
조기축구회에 가니 오다가다 마주쳐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40대 이상이었고, 20대와 30대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갓 스무 살인 나는 같은 20대까지만 형님이라고 했고, 그 이상은 삼촌으로 호칭을 통일했다. 삼촌들도 그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신 듯했다. 삼촌들을 천천히 보니 그동안 오다가다 마주쳤던 분들이 많았다. 마트에서 일하시는 분, 카센터에서 일하시는 분뿐만 아니라 세탁소, 정육점, 부동산, 문구점, 태권도 관장님, 식당 사장님 등 가까이에서 뵈었던 분들이다.
조기회에서 만나는 삼촌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축구에 진심이다.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있는 날엔 누구 사장님 댁 치킨집에서 모여 맥주를 마시며 온통 축구 얘기다. 일요일 조기회 모임에서도 온통 축구 이야기뿐이다. 군대 이야기 못지않게 끝나지 않는 주제가 축구였다. 각종 이적설 뿐만 아니라 멋진 골 장면과 국내 선수의 해외 진출 팀에 대한 각자의 생각 등 끝이 없었다. 듣고만 있어도 축구 정보를 실시간에 가까울 정도로 알 수 있었다.
조기회에서는 따로 훈련하는 시간이 없다. 오직 다른 조기회와 경기뿐이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경기 시간을 연장한다. 경기를 하면서 훈련을 한다. 축구 경기가 곧 훈련이다. 경기 외에는 서로 축구 얘기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이미지트레이닝을 하는 것으로 훈련한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목욕탕에서 목욕 후 식사를 하면서 축구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또 이미지트레이닝을 하는 것이 훈련이다.
조기회에서 처음 경기를 뛰던 날이다. 젊음과 패기로 상대팀 삼촌들을 제치고 멋진 골을 넣겠다고 다짐하고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오른발 잡이인 나는 왼쪽 윙 공격수로 뛰었다. 축구는 11대 11로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왠지 내가 볼을 잡을 때마다 1대 21로 시합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볼을 잡으면 우리 팀 형님들과 삼촌들 모두가 자신에게 패스를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심지어 저 멀리 있는 골키퍼 삼촌도 어딘가 손짓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실전과 훈련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주눅이 들어버린 나는 마음껏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다. 그날의 축구 이야기 주제는 나였다. 풀이 죽어있는 나는 삼촌들의 안중에 없었다. 패스 방향과 움직임 등 끝나지 않는 이미지트레이닝을 받았다. 첫날부터 혹독한 훈련과 신고식을 치렀다. 나이가 어린 신입 회원이 왔으니 당연히 궁금하기도 하고 알려주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됐지만 나에게 악감정이 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 스스로를 소심하게 만든 것은 나였다.
조기회 출석이 늘어날수록 축구 외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축구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에 빛이 나는 형님들과 삼촌들. 심지어 경기는 뛰지 않으시지만 벤치에서 입축구를 시전 하시는 출석률 100%인 삼촌. 연말과 연초에 다른 조기회들이 서로의 행사마다 얼굴을 비추며 교류를 하는 모습. 여름이면 막걸리에 수박 등 온갖 과일이 준비되고 가을이면 1박 2일 야유회를 가서 축구와 고기파티가 이어진다. 겨울이 되면 컵라면부터 시작해서 국밥을 한 그릇씩 먹을 만큼의 큰 솥과 음식들이 장만된다. 그리고 삼촌들은 준비한 음식을 동생들이 잘 먹을 때 세상 행복한 얼굴로 더 먹으라고 하신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삼촌들은 나와 친분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할 텐데 같은 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뜰하게 챙겨 주셨다. 그저 조금의 회비를 내고서 실컷 먹고 운동만 해도 되는지 죄송하고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물론 조기회 회비로 운영되는 부분이 있지만 부족한 것들은 모두가 선뜻 자신의 것들을 내어 주었다. 오랜만에 운동을 나오시는 삼촌들은 미안한 마음에 먹거리를 푸짐하게 준비해 오시거나 그날 저녁식사를 거하게 계산하셨다. 나는 이를 보고 자기 자리를 찾는 것과 염치라는 것을 알았다.
몇 주가 지나자 형님들이 나에게도 임무를 주기 시작했다. 당일 아침 일찍부터 물건을 옮기거나 운동하기 전날 장비나 음식을 미리 챙겨놓는 것을 돕는 일이었다. 비록 허드렛일이었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도 팀의 일원으로서 역할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뿌듯했다. 내가 조기회에서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내가 도움이 된다는 것에 기뻤고, 티가 나지는 않지만 이렇게 형님들과 삼촌들을 챙기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형님들과 삼촌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누구 한 명도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사람이 없었다. 기본적인 예의는 나이 순으로 위계가 잘 지켜졌고 눈치껏 자신의 언행 정도를 알았다. 분위기가 이러하다 보니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솔선수범 하고 그 노고를 모두들 앞에서 치하했다. 또한 경기장에서 만큼은 나이에 상관없이 감독님과 코치진에게 큰 권한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다. 매주 일요일이 모두에게 잔치였고, 운동까지 하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었다. 모든 회원들이 한 주간 쌓인 스트레스를 다 털어버리고 충전하는 소중한 모임인 것이다. 한마디로 살 맛 난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축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축구 전문가가 되고 축구가 곧 종교가 된다. 실제로 축구를 전혀 해본 적이 없는 형님이 새로 가입하셨는데 역시나 첫날에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축구 이론 전문가가 됐다. 누구보다도 축구에 진심이셨고 기량 향상을 위해 매일 저녁 개인 연습을 하셨다. 축구를 잘하고 못하고는 경기에서만 중요할 뿐, 회원으로서는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축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환영받았다. 모두가 가까운 이웃이었고 실력이 향상되면 그에 맞춰 칭찬으로 화답했다. 오히려 축구만 잘할 뿐, 인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람은 조기회 가입 문턱을 넘지 못했다.
비록 지금은 고향을 떠나 있기에 그 시절 조기회에 나가지는 못한다. 그러나 당시에 조기회가 운영되는 과정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토록 했다. 내가 누리는 것은 누군가의 노력과 헌신이 있다는 것.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봉사와 노력, 헌신으로도 채울 수 있다는 것. 소속감은 나에게 맞는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 역할은 누가 정해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찾을 수도 있다는 것. 그 역할로 인해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축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 것. 내 역할이 있다는 것. 그것이 살 맛 나게 하기에 축구인들은 축구를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