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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아 Mar 22. 2023

다섯번째 풀코스를 뛰었습니다

42.195km를 달리는 마음


  마라톤 풀코스를 끝내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마음이어서, 그 마음을 차분히 정리하고 다음 레이스를 맞이하는 것이 나의 루틴이 되었다. 어제의 풀코스 또한 여러 감상이 많지만, 특히 어제는 뛰면서 ‘그래, 이건 스포츠지, 훈련이었지’라는 생각이 대부분이었기에, 나의 다섯 번째 풀코스 후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마를 나갈까말까 고민하던 12월을 어영부영 보내고, 1월에 이사 준비로 겨우 60km를 뛰는 적디 적은 훈련량을 마주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 2월에는 150km 뛰기를 목표로 해보는거야. 3년 전에 해보고 한 번도 못 했던 150km 달리기를 2월의 목표로 다이어리에 적고 나니, 새삼 그 거리와 시간이 내게 허락될지 걱정되었다. 육아도 하고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니 그 사이사이에 달리기를 끼워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사로 직장과 집의 거리가 가까워져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새로운 전환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새벽달리기를 택했다.

  

석촌호수는 새벽만 고요하다.


  새벽 5시 50분쯤 일어나 레깅스를 입고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장갑을 끼고 에어팟을 낀 채 문을 나서면 거리는 여전히 짙은 어둠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그 어둠을 뚫기 시작하면 어느새 졸음과 피곤이 달아났다. 석촌호수는 새벽 6시에도 걷는 사람들이 꽤 있고, 조명도 잘 되어 있어 새벽 달리기 장소로 적합했다. 매일이 활황인 석호도 새벽에는 고요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불을 밝히는 롯데월드의 조명도, 함성과 신나는 비명이 뒤섞인 사람들의 소리도, 보랏빛으로 매일 물드는 롯데월드몰도 모두 침묵이었다. 그 아무것도 깨지 않은 듯한 조용한 공기와 그에 대비되는 내가 듣고 있는 노래와 나의 달리기. 5km 남짓 뛰면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왕창 듣고, 회사에 출근해 일하다가 불현듯 ‘앗 오늘 운동은 이미 했지ㅎㅎ’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진심으로 좋았다. 그렇게 새벽달리기가 쌓여가며 훈련량도 늘고 자존감도 좋아졌다.


2월 벼락치기 연습. 사실 목표달성을 한 것만으로도 뿌듯했지만


  토요일 동호회 훈련을 나가고, 일요일 오전에 친구들과 장거리를 뛰는 날이 이어졌다. 2월의 마지막날 6km를 뛰며 153km를 채웠다. 기록해둔 2월 목표에 별표를 치며 ‘했다! 목표달성’이라고 적었다. 목표달성이라는 말을 36살에도 할 수 있다니, 그것대로 또 좋았다.


우리 아들의 태명은 '꿈동(꿈꾸는 동아마라톤)'. 이름을 실천하기 위해(?) 생일 축하 배번을 달고 42.195km를 뛰었다


  드디어 레이스 당일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정갈한 마음으로 밥을 챙겨먹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동마는 19년 이후 4년만이라 광화문에 모인 러너들이 낯설면서 반갑다. 대부분 평지로 이어지는 코스인데다가, 서울 시내를 달리는 경험은 진귀하기 때문에 다들 얼마나 좋은 기록을 낼 지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난 작년 춘천마라톤의 기록(4시간 15분)보다 빨리 들어오자로 목표를 조금 낮췄기 때문에 부담은 없다. 다만, 걷지만 않으면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자만심이 될까 계속 경계했다. 99%의 연습이 있어도, 1%의 못된 정신력으로 전체를 망칠 수 있는 것이 풀코스이다. 아무리 적어도 3시간 이상은 뛰어야 한다. 호흡을 길게 가지고 절대 순간 순간마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의 나의 목표였다.


  첫 6km는 평균 페이스보다 천천히 시작하라는 광달이의 컨설팅을 되새기며 절대로 오버페이스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극초반부에 까먹는 시간이 아까워 조급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어차피 6km의 7배는 더 뛰어야 레이스가 끝난다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그런 마음으로 뛰니 어느새 거리는 10km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간 뛰었던 풀코스 중 가장 쉬운 10km였다.


  10km를 넘어서며 나 자신의 페이스를 찾으려 했다. 장거리에는 매진했지만, 스피드 훈련은 되어 있지 않아 경기 직전까지 몇 분 페이스로 뛸지 정말 고민이 많았다. 얼마로 뛰어야 할지 여전히 혼란스러운 가운데 시계를 자꾸 보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이러면 안되는데, 하며 일단 5:50 페이스로 가보기로 했고 속으로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몇 십번을 되새기며 청계천 상가와 평화시장을 지났다. 이 길이 끝나면 종로다. 종로에는 응원단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20km 지점으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20km 지나는데 2시간이 안 걸렸다. 몸도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 이대로 가보자.


  반가운 응원단을 뒤로하고 21km를 넘어섰다. 작년 춘마 때는 훈련이 부족해 이 때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더욱 신경을 쓰며 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2월에 30km 남짓 되는 거리를 2번 정도 뛴 효과 덕분인지 25km를 넘었는데 페이스가 일정했다. 계속 ‘힘 빼자, 힘 빼자’를 되뇌며 몸짓에 리듬감을 주었다.  그늘이 계속 나타나 크게 덥지 않았지만, 스펀지존을 만날 때마다 몸에 물을 뿌리며 더위를 식혔다. 예상 외로 바람이 생각보다 세게 불어 나보다 덩치 큰 남자분들 뒤에 조금 붙어 바람을 피하기도 했다. 군자교에서 생각지 못한 응원단(!)을 또 만나 힘을 얻었다.


  30km가 되니 오른쪽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런 적 거의 없는데, 파스도 두 차례 뿌려달라 요청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아팠지만, 1시간만 참자-하며 어린이대공원을 지나갔다. 33km 휴레소에서 콜라 한 잔 얻어먹으니 힘이 나서 약간 느려진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이제 정말 10km도 안 남았어. 적어도 잠실대교까지만이라도 뛰어서 가자-고 나를 설득했다.


  페이스가 느려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하며 잠실대교에 진입했다. 아, 힘들다. 생각하는 순간 응원하는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오르막은 끝났습니다!!” 앗, 오르막이었구나! 실제로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힘이 솟았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니까. 잠실대교를 마치자 잠실역 주변으로 응원단이 빼곡하다. “거의 다왔습니다”하는 목소리를 뒤로 하며 종합운동장으로 향한다. 운전연수 받을 땐 몰랐는데, 종운가는 길이 너무 멀다. 가민을 끄고 싶다는 충동을 정말 세게 느낄 때, 갑자기 광달이가 나타나 레몬 하나를 쥐여준다. 레몬을 물자 정신이 번쩍 든다. 도착지에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실제로는 없었지만)란 망상 아닌 주문을 스스로에게 걸며 종합운동장 주차장에 진입했다. 여기엔 무조건 친구들이 있다, 여기까지 와서 걸을 수 없어.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드디어 종합운동장 트랙에 들어선다. 마지막 300m. 남아 있는 힘을 다 쏟아붓는다. 드디어 끝났다!


어쩌다보니 출산 후에 계속 PB를 갱신하고 있다. 엄마가 되고 정말 깡이 생긴 것인지도


  벼락치기였지만 2월 한 달을 나름대로 착실하게 훈련한 결과 덕분인지, 23년 동마 풀코스는 길게 느껴지지 않았고, 페이스도 일정하게 가져갈 수 있었다. 20km까지는 짧다고 느꼈고, 가장 쥐약인 25~30km 지점을 생각한 페이스대로 가니 뛰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항상 교과서처럼 연습량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막상 그 결과를 마주하니 정말로 달리기는 순수한 스포츠임을 다시 한 번 절절히 느꼈다. 그 순수함이 좋아서 또 뛰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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