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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은 없고 맥도널드만 있다.

by 김민찬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용기를 내 하나씩 시도했다. 아직 체감하는 ‘성공’은 없지만, 끝내 이루어내면 후회 없는, 나만의 주도적 삶을 살고 있다는 만족이 밀려온다.


빡빡 깎은 머리, 학교와 부모님 말씀을 잘 따르는 순한 학생으로 초·중·고를 보냈다. 진짜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그리기보다 국영수와 암기 과목을 달달 외우며, 사람들이 말하는 명문대만을 꿈꿨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정말 하고 싶은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대학에 가서도, 졸업해 직장을 얻고 나서도 그랬다.


첫 직장에 들어가 10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나의 정체성과 자아를 더듬기 시작했다. 가족이 있는 상황에서 하고 싶던 사업을 시작했고, 경영 악화로 정리한 뒤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영혼은 점점 메말라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떠올린다. 우리가 사는 곳은 노동 사회, 성과 사회다. 자유롭기보다 스스로 새로운 노동을 만들어내며 과잉 활동에 내몰린다. 결국 우리를 혹사하는 이는 독재자도 사장도 아닌 ‘나 자신’이다. 우울은 긍정의 과잉이 빚어낸 사회적 병, 자기 자신과 벌이는 전쟁의 그림자다. 21세기는 규율 사회에서 성과 사회로 넘어왔다. 과거의 금지와 명령, 법률 대신 “아이 캔 두”의 긍정, 이니셔티브와 모티베이션, 프로젝트가 생산성을 밀어 올린다. 우리는 규율의 졸업장을 받고, 성과 주체로 계속 달린다.


현지에서 블랙마켓으로 구한 소주가 냉장고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오늘도 혼술로 소주 반주에 김과 계란 프라이를 곁들여 늦은 저녁을 때운다. 휴대폰을 와이파이에 겨우 연결해 유튜브를 틀면 잠시 세상이 멀어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인터넷조차 설치되지 않아 와이파이도 없었다. 면허증도, 차도 없는 채로 사막 한가운데 빌딩에 갇힌 수용소 같은 고립감. 가슴이 터질 듯해 옆 빌딩 동료와 쇼핑센터로 걸어가 커피 한 잔을 나눴다.


처음 집에 들어섰을 때 바퀴벌레가 방을 점령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짐을 풀 수 없어 며칠간 침대 위로 올려두고 끌어안고 잤다. 방역업체를 부르자 인도인 직원 둘이 맨발로 들어와 흰 반죽을 막대기에 묻혀 창틀과 하수구에 찍고는 고양이 발자국 같은 자국을 남기고 떠났다.


새벽 3시, 오늘도 아잔 소리에 깼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고, 그 울림은 내 영혼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내 방은 4층, 바로 옆이 모스크라 소리가 크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묘하다. 아잔은 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 다섯 번의 시간이 되면 “알라는 지극히 크시도다. 우리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맹세하노라…”라는 메시지가 울린다.


새벽 4시 알람에 일어난다. 햇빛은 벌써 강렬하다. 중동은 낮이 뜨거워 오전 8시에 일을 시작해 오후 5시에 마친다. 내가 사는 샤르자에서 두바이로 출근하는 이들이 많아 아침엔 서둘러 나서야 한다. 학기 중이면 스쿨버스까지 겹쳐 길은 더 막힌다. 새벽 5시에 나왔는데도 햇볕은 눈부셔 선글라스를 넥타이처럼 걸었다. 모래가 춤추는 도로 위에서 한국의 올림픽대로를 떠올렸다.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휴대폰으로 내려받아 들으며 회사로 향한다.


내가 다니는 곳은 물류 회사다. 직원의 절반은 한국인, 절반은 인도·파키스탄 사람들. 처음엔 그들의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씩 귀가 열린다. 오늘은 외근이 있어 직원들과 쇼핑센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랍이나 인도 음식은 아직 도전하지 못해, 한동안 맥도널드 햄버거만 먹다 질려 요즘은 샐러드만 먹는다. 한국에서는 햄버거를 가장 싫어했고, 그중에서도 맥도널드를 가장 피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본 샐러드 메뉴는 한국에서 팔아도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에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맥도널드에서는 소프트 아이스크림만 먹던 내가, 여기선 샐러드를 먹는다.





나는 평범하게, 생각 없이 편한 길만 바라보며 대학에 갔다. 군대도 사회복무요원으로 조용히 다녔다. 직장도 운 좋게 지방에서 무난히 다녔다. 예쁜 여자와 연애해 결혼했고, 다행히 그녀를 닮아 나보다 잘생긴 아들도 얻었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였지만 마음엔 공허함이 차곡차곡 쌓였다. 입사 9년차, 아내와 상의한 뒤 나를 찾으려 홀로 여행을 떠났다. 그때 양귀자의 『모순』이 떠올랐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모든 이에게 행복해 보였던 이모의 삶이, 정작 본인에게는 “무덤 속 같은 평온”이었을지 모른다는 대목.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결정체가 아니면 마음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그 모순이 내 삶을 전진시킬 것이라 믿었다. 우이독경(牛耳讀經). 혹시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달고 사는 건 아닐까.


결국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하고 싶던 사업을 시작했다. 초반엔 잘됐다. 월급쟁이로선 만져보지 못한 돈도 벌었고, 눈치 보지 않는 시간이 좋았다. 1년도 안 돼 직원을 채용하고 사무실을 늘렸다. 하지만 ‘사장’이라는 정체성이 몸에 스미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1년이 지나 알았다. 내게 들어온 돈은 내 돈이 아니라 거래처와 국가로 흘러가는 자금의 통로라는 것을. 그걸 모르고 내 돈인 줄 알며 계획 없이 썼다. 믿었던 직원이 동생 명의로 사업자를 내어 몰래 거래한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클레임이 겹치며 경영은 악화했고, 배신감은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돈의 노예가 되어 그 삶을 ‘즐기고’ 있었던 나를 보았다. 강한 복심이 필요한 사업은 내게 맞지 않다는 결론에 빨리 도달했다.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정리하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왔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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