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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뽕 May 29. 2017

노란 리본의 아픔

위로할 마음이 없는것은 괜찮습니다. 상처를 헤집진 말아주세요.

스물아홉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스물넷에 첫아이를 스물여섯에 둘째 아이를 낳고, 정작 아이가 예쁜줄도 모르고 어린 나에게 치여 내 아이를 귀애하지도 못하고 키우다.. 조금씩 지나가는 아이도 예쁘고, 또 아이를 가지고 싶었던 그 해...

아이를 갖고싶은 욕망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남의 아이를 덥썩 안아 오고 싶은 생각마저 들곤 했습니다.

그 지옥같던 입덧마저 그리웠던 어느 날..

하늘이 무심치 않았던건지, 아니면 셋째를 열망하는 나에게 욕심이라는걸 알려주고 싶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번째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수유중에조차 어긋나지 않았던 생리주기 덕에 생리를 거르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직은 아기가 보이지 않지만 자궁상태를 보니 임신이 거의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아이아빠가 몸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하고 직장을 다니지 않던 시기였어요.

그리 원할때는 안오다가 제일 힘든 시절을 지나는데 찾아온 아이...

그렇게 원하고 원했는데 정작 아이가 찾아오자 이 아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와서 아이 아빠에게 아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스물네살 혼전임신에도 흔들림없던 아이아빠였는데,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낳아서 뭘 어쩌겠다는거냔 말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첫애는 혼전임신이라 축하를 못받고, 둘째는 생각보다 너무 빨리 생겨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토록 원할때 올일이지 왜 하필 지금이어서 이 아이마저도 난 축복받지 못하나 싶어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한달 반...6주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이를 낳겠다고도 낳지 않겠다고도 결심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뒤틀리는 복통은 마치 뻐근한 생리통 같았고.. 흡사 배앓이를 하는 느낌이어서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리고 착하기도 한 나의 열망어린 셋째 아이는 엄마에게 통증도 하나 주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없던것처럼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병원에서는 그저 엄마가 생리가 빠진걸 너무 빨리 알아서 임신인걸 알았을뿐, 이런 경우는 거의 늦은 생리인줄 알고 지나가는 경우가 90% 이상이니 유산이라고 생각하며 속 앓지 말고 그저 늦은 생리가 이제 찾아왔구나 하고 지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경우 착상 자체가 불안정해서 도퇴되는 자연의 섭리라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약한 세포가 견디지 못하고 도퇴된거라고...제가 너무 우니까 그리 말씀해주셨는데 전 그 이야기는 하나도 안들어오고, 그 6주의 나의 못난 망설임이 미어지도록 아팠습니다.


내가 반겨주지 못해서 아이가 가버렸나...

내가 낳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서 아이가 화가 났나....이런 엄마는 싫다 가버린건가...

할수만 있다면 떠나는 아이의 발 뒤꿈치라도 잡고 엄마가 미안하다.....너 싫어 그런거 아니다...

하루도 널 원하지 않은 날 없었다....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 태안에는 아이가 없다고 합니다.

수술을 할 필요도 없을만큼 흔적없이 떠나버린 아이가 시리도록 파랗게 예쁜 오늘 하늘을 보니 떠오릅니다.



십년이 조금 못된 시간이 흘러도 그 날의 기억이 어제처럼 떠오릅니다.

제대로 된 형태도 보지 못했고, 그저 임신 사실만으로 아이가 내안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이렇게 지워지지 않고 가슴을 아프게 하는데, 다 키워놓은 자식이 잘못된 분들은 그 가슴을 어떻게 끌어안고

사실지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배우자를 잃은 사람을 이르는 말도 있고, 부모를 여읜 사람을 이르는 말도 있는데, 자식 잃은 부모를 이르는 말은 없을까요... 아마 무어라고 이름붙일수 없는 형용할수 없는 아픔이니 그렇겠지요...


세월호 유가족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실종자 가족분들이 3년이란 시간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가족들이 차가운 물속에서 한분 두분 돌아오고 계십니다. 못돌아오시는 분 한 분도 없이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시길 기도합니다. 어느 날 부터인지 꽃같이 피어 눈부시게 만개해야할 아이들이 스러져버린 그 악몽이 언론에서 나오면 나도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아직 내 가방에 내 팔목에 매달린 노란리본이 마치 내 아이 떠난 일인듯 가슴이 미어져 자꾸 눈물이 나기 때문입니다.

새로 산 옷이며, 신발이며, 심지어 엄마한테 받아간 용돈도 고스란히 유품으로 나오던 그때...

오열하는 유가족을 바라보며 한번도 그 아이가 남의 아이임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비겁한 나의

간사한 마음이 차마 내 아이일이 아닌것에 안도하는것이 너무 죄송스러웠습니다.

노란리본을 달던 날부터 수도 없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좌파냐는 질문도 있었고 심지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쯧쯧 혀를 차며 쓴소리도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한말은 전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아이키우고 아이사랑하는 엄마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엄마라서 내아이 남의아이할것 없이 귀하고 귀해서 아픈것이지요.

그 아픔에 왜 좌파 우파가 필요하고, 정치적 계산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애도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만해라, 자그마치 3년이다.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에게야 남의 일이니 자그마치 3년이지만 아이를 또 가족을 떠나보낸 분들에게야 어제같은 3년일 겁니다.

저마다의 생각이 다르고, 어쩌면 그 죽음을 모두가 뼈아프게 애도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건 개인의 사고의 차이이고, 그걸 왜 애도하지 않느냐 질책할수도 없습니다.

자그마치 3년이란 생각이 들더라도, 유가족을 생각하면...굳이 그걸 입밖에 꺼내 아픈 사람 뺨때릴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요?

옆집사람과 악연중의 악연이라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아 볼때마다 싸웠다치더라도, 그 사람이 죽었을때 그의 죽음이 전혀 슬프거나 하지 않을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 초상집에 가서 모진말을 하진 않는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애도할 마음이 없으면 문상을 가지 않으면 그만이지 굳이 가서 남은 사람 가슴을 후벼팔 필욘 없으니까요.



누구나 다 위로를 하고 도닥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공감하는 사람들이 하겠지요.

다만 다독일 마음이 없다면, 적어도 아픈 가슴을 헤집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부모이지 않은가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일입니다. 언제까지라는 기한은 없습니다.

그건 남은 사람의 몫이니까요.


시리게 파란 하늘을 보며 한번 제녀석 모습 뵈지도 못하고 떠난 아이가 오늘은 유독 아립니다.

좋은 세상에서 잘 살고 있는지, 아니면 봄날 벚꽃처럼 흐드러진 내 아이 나보다 좋은 엄마 만나

어여쁘게 크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엄마가 그때는 너무너무 힘들어서 너 두팔벌려 환영해주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저 의학적 증상으로만 나를 엄마로 만들었던 가엾은 나의 막둥이...

그리고 어느날 꿈처럼 사라진 우리 아이들...

모두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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