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넘어지지만 누구나 일어서진 않는다.
나는 우울증 환자다.
환자라는 말이 조금 어색하지만, 우울증 약물 치료를 받고 있으니 나는 우울증 환자라고 하겠다.
어릴때부터 나는 디폴트값만큼은 우울한 아이였다.
그때야 우울이라는게 뭔지 알지도 못했을 나이였지만, 이제 생각하니 나는 만성적으로 조금은 우울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인정욕구가 강하고, 사회성이 강한 나는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항상 남의 평가가 나의 기준이 되고, 가치가 되다보니 서서히 그 기준에 맞추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지쳐갔다.
첫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으로 처음 나를 찾아온 우울증은 쉬이 떠나가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약을 먹으면 나아지는 듯 했지만,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증상은 나빠졌고, 급기야 공황장애마저 발병해서 과호흡과 급격한 가슴두근거림으로 원인없는 병을 찾아 몇번이고 응급실을 드나들었다.
이혼 후 나는 울어보지 못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이혼의 절망과 상실 속에서 목을 놓고 울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두 아이가 있었고, 때마침 건강상의 이유로 그만둔 직장 때문에 다시 취업준비를 해야하는 기로에 놓였다.
직장 잘 다닐때는 이혼하잔 말도 안꺼내다가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이혼을 합의한 전 남편도 원망스러웠다.
정신없이 3개월을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다니다보니 이혼의 절망과 상실은 내겐 사치였다.
운다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저 아이둘과 살아야한다는 생각만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이 회사 저 회사를 전전하던 시간이었다.
사춘기 두 아이는 더이상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었다.
냉정하게도 학업을 계속 하는 아이들을 키우는건 슬프게도 "돈"이었다.
시종일관 돈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혼 후 내게 돈은 절대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내가 돈을 벌지 못하면 날개가 꺾이는건 내 아이들이다.
엄마 이거 해줘 저거 해줘 날로 요구는 늘어나는데, 자꾸 줄어드는 통장 잔고는 나를 너무나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느 추운 11월 나는 다행히 직장을 찾을 수 있었다.
안도와 함께 내 마음의 긴장이 풀어져서였을까? 아니면 상실의 아픔을 애써 숨기며 울지 못한 시간 속에서 마음이 병들었던 걸까?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나는 짧게는 1주일에 한번 길게는 3주에 한번 응급실을 찾았다.
각종 검사를 해도 병의 원인은 나오지 않았다.
병증은 있으나 병명은 없는 그저 신경성이라는 소리만 지겹도록 듣는 날라리 환자가 되었다.
울면 아이들이 불안해 할거야, 울지 말아야지..
어느날부터였을까?
나는 우는 법을 잊었다.
슬퍼도 화가났고, 억울해도 화가 났다. 툭 건드리면 터져버릴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나는 감정을 꾹꾹 눌러담았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너무나 두렵고 외롭고, 마치 커다란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처럼 무섭다고 외치고 싶었다. 지나가는 사람이든 가족이든 누군가의 품에 엎어져 목을 놓고 울고싶었다.
누구라도 나를 위로해주길 바랬다.
괜찮다고, 누구나 사는건 외로우니 울어도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려주세요!!!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좀 이 어두운 터널에서 꺼내주세요!!!!!
라고 외치고 싶은걸 꾹꾹 누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강해져야해!! 넌 엄마잖아. 스스로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마. 뒤돌아보지마. 앞만보고 뛰는거야"
퇴근하던 길, 더는 운전을 할 수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이 아득하더니 곧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러다가 큰 사고를 낼것만 같아 젖먹던 힘을 다해서 골목에 차를 세우고 차문을 열었다.
두팔과 두다리로 엉금엉금 기어서 차에서 나와 바깥공기를 쐬며 힘겨운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괜찮아질거야"
아무리 속으로 최면을 걸어도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은 보란듯 터질것같이 두근거렸고, 방치한 나에게 항의라도 하듯 과호흡은 심해졌다. 다행히 편의점 사장님이 나오시다 나를 발견해 나를 운전석에 앉혀주시고 차가운 물을 한모금 권했다.
"천천히 숨을 쉬어보세요"
그 날 처음 알았다. 나는 천천히 숨을 쉴수 없었다.
죽을 것만 같은 과호흡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는 천천히 숨쉬는 법을 잊었다.
아니 천천히 살아가는 법을 처음부터 몰랐는지도 모른다.
다시 병원이다.
내 맘대로 약을 끊고 나빠지면 다시 먹기를 반복한 처절한 대가였다.
나를 돌아보지 않자 마음의 병이 생기고, 그래도 돌아보지 않자 몸이 아팠다.
아픈 몸은 내 삶에 제동을 걸었다.
그건 마치 신호등의 빨간불과도 같았다. 멈추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다는 경고와도 같았다.
하루도 죽고싶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무리 힘을 내려고 해도 힘이 나지 않았고, 삶의 의미를 찾을수도 없었다.
죽고싶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들수록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귀찮았다. 아이들도 일도 숨을 쉬는것도..
내 이야기를 쭉 듣던 의사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죽진 않겠네. 안죽겠다고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예?"
"죽을려면 집에서 목을 매든 번개탄을 피웠겠지. 이 대기시간을 견디며 여기까지 와서 죽고싶다고
말하고 있겠어?"
그래서 지금 내가 살아있는게 유감이라는거야 뭐야!!
"그만큼은 마음의 용기가 남아있었던거예요. 우울하다고 아무나 병원을 찾아오진 않아. 우울하고 죽고싶은 때 병원을 찾아오는 건 아직 스스로에게 애착이 남아있다는거지. 그만큼은 살 용기가 있었던 거예요.
살면서 누구나 다 넘어져. 그렇다고 툭툭 무릎을 털고, 깨진 무릎에 약을 바를수 있는건 아니야. 그것도 아픈 상처에 따가운 약을 바를 용기는 있어야해. 강한 사람이예요 당신은.."
강한 사람이예요, 당신은..
눈물이 봇물터지듯 터졌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선생님이 내 두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손의 온기가 그의 손을 타고 전해졌다. 순간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있구나.......
"가끔은 열마디 말보다 더 힘이 되는게 사람의 온기지. 미운것도 분노하는것도 살아있어야 가능한 거예요.
그러니 우울한 나를 너무 질책하지마. 숨이 막히는 공포도 죽고싶단 생각도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애써 이기려고 하지말고, 아 내가 살아있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훈련도 필요해. 감정도 운동처럼 훈련을 해야해.
날때부터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한참을 목놓아 우는 나를 선생님은 내버려두었다. 아무 위로도 하지 않고, 재촉도 하지 않은채 그저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진이 빠지도록 울고 난 나에게 그가 말했다.
"울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니, 자신을 너무 몰아치지 말아요. 화를 내도 울어도 아무일도 생기지 않는다는걸 진심으로 믿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편안해질거예요"
한달치의 약봉지를 받아들고, 생각했다.
이 약은 스스로 죽지 않겠다는 내 의지다.
내 마음의 용기이고, 엄마로서 씩씩하게 살아가겠다는 용기다.
싱글맘이 되고 어쩌면 난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가혹했는지도 모르겠다.
절대 세상에 지지 않아야지, 누가 날 어떤 시선으로 보더라도 괜찮아.
나는 당당하게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게 절대 아빠없이 아이를 키운다는 말을 듣게 하지 않으며 보란 듯 살아낼거야.
하지만 세상에 져도 누가 날 어떤 시선으로 보든 내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걸 알았다.
세상에 져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면 되고, 누가 날 어떤 시선으로 보든 그건 보는 이의 몫이다.
당당하지 않으면 어떤가? 때론 조금 비겁해도 된다. 살아간다는건 누구나 돌직구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 아이들은 아빠가 존재하고 누구도 아이가 아빠없는 아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니 혼자만의 세상에서 나혼자 나를 괴롭히고 있어봐야 피폐해지는건 나 하나였다.
병원을 나서며 바라보는 세상은 어제와 다른 세상이었다.
여전히 나는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한다.
하지만 이제 내가 인생의 낙오자나 루저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저 아프니 병원을 가는건 당연한 일이고, 내가 운다고 내 삶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오늘을 살고 있고, 살다가 넘어지고 넘어지면 일어서고 깨진 무릎이 많이 아프면 운다.
용감하게 울고, 툭툭 털고 일어나는 용기로 오늘을 사는 내가 어느때보다 당당하다고 느낀다.
울어도 괜찮다.
울고 일어설 줄 아는 것이야 말로, 내가 그토록 원하던 당당한 싱글맘.
그 첫걸음이라는것을 아는 지금 그것이 조금도 두렵거나 창피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