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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민 Oct 30. 2022

14.



부스럭. 해단은 머리맡에서 작은 기척을 느꼈다. 번쩍 눈을 뜨자, 해단은 도토리를 든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청설모와 눈이 마주쳤다. 놀람도 잠시, 자신이 도망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해단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설모는 쏜살같이 달려서 나무 위 어딘가로 사라졌다. 해단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자신의 오른손이 비워진 걸 느끼고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해단과 네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명호가 누워 있었다. 움직임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명호를 보고 놀란 나머지 해단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명호의 이름을 부를 뻔했으나, 큰 소리를 낸다는 것은 자칫, 인민군에게 나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기에 그나마 남은 이성으로 이빨을 맞물려 세게 물으며, 분열에 찬 흐느낌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았다. 

곧바로 명호에게로 가려고 했으나, 몸을 일으켜 한 걸음도 다 딛기 전에 해단은 다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세상이 도는 것 같았다. 그냥 놓아두면 금방이라도 울분을 터트릴 것 같은 자신의 입을 한 손으로 막은 채, 해단은 다른 한 손으로 바닥을 짚어가며 기어가다시피 명호에게로 갔다. 다행히 명호는 숨을 쉬고 있었다. 기절해 있는 듯했다. 해단은 그제야 안도하며 주저앉듯 명호의 옆에 누웠다. 어느새 구름은 걷히고 달이 밝게 떠 있었다. 이전에 봤던 달보다 좀 더 덜 기운 것, 그러니까 달이 도로 뒤로 간 것 같았다.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그럴 리가 없지. 해단은 자신의 오른쪽 목으로 손을 가져다 대며 속으로 읊조렸다. 진득한 액체가 목 옆에서 만져졌다. 색은 잘 보이진 않지만, 피인 듯했다. 떨어지면서 나뭇가지든 뭐든 날카로운 것에 목이 긁힌 듯했다.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으나, 계속 하늘이 빙빙 도는 것으로 보아 상태가 마냥 괜찮다고만은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긴장하느라 주고 있던 힘이 조금 풀리자, 주고 있던 힘에 의해 밀려나 있던 통증들이 다시 온몸에 내리 꽂히듯 밀려 들어왔다. 혈관에 가시가 돋아나 온몸을 찌르고 있는 듯한 통증이었다. 

밤인 와중에도 붉은색이 가려지지 않았던 검붉은 피의 기분 나쁜 감촉, 왼쪽 귀 바로 가까이서 들려오던 총소리, 매캐한 흙먼지에 뒤덮여 채 하늘로 솟구치지 못한 고통 가득한 신음 소리들, 개 짖는 소리, 눈 시리게 번뜩이는 섬광들이 지나고 난 자리에 남아 시야를 가리던 그을린 빛의 잔상들 등, 모든 것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건 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해단이 숨을 내쉬었다. 내뱉은 숨이 공기에 닿는 동시에 추위에 얼어붙듯 새하얗게 변하더니 이내 공중으로 흩어졌다. 공기보다 무겁다던 무언의 숨도 추위에는 별 수 없는 걸까.  가을이 채비를 서둘러 계절을 떠났는지, 겨울이 가을을 재촉했는지, 어느새 겨울은 발끝에 성큼 다가와 있는 듯했다. 찼다. 날이, 차디 찼다. 


“단아. 와 이래 얼굴이 차노. 차디 차다.” 

당시 아직 한참 어렸던 명호를 업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송연과 하성을 마중 나온 해단의 붉은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송연이 했던 말이었다. 

고위급 간부 군사단 만찬이 있던 날, 그곳에 송연과 하성도 참석했었다. 그때는 겨울이 몰아치고, 북한에 대기근이 본격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한 때였다. 거리엔 시체가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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