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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민 Oct 30. 2022

13.



“잠 좀 자두라요.” 장작 앞에 앉아 불을 지피던 그가 말했다. 

“무얼 믿고 잠을 잠네까.” 해단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어떤 적의나 적개심 같은 건 담겨 있지 않았다. 정말 그저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다시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하나씩 태우기 시작했다. 해단의 옆에선 명호가 새근거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해단은 곤히 잠든 명호를 가만히 바라보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 들어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타닥거리며 타들어가는 불꽃은 밤하늘을 향해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이제는 풀벌레 소리마저 잠잠했다. 한껏 기운 달을 보니 동이 틀 시간도 머잖은 듯했다.

“이제는 어떻게 되는 겁네까.” 숨소리마저 삼켜질 듯한 고요를 깨고 먼저 말문을 연 건 해단이었다. 

“나가야디.” 여전히 불을 바라보며 복면 쓴 사내가 말했다. 

“어디.”

“북한 밖. 북한이 아닌 곳이라면, 어디든.”

“제 어머이는요.” 

“너희 보내고 내래 대신 묻어 주갔디.”

“당신이 뭔디 기럽네까. 왜 생판 남에게 잘해줌네까. 내래 당신 뭘 믿고 우리 어머이를 맡깁네까.” 

“지금은 알 거 없네. 내래 갚아야 할 게 있어서 그런 거네, 신경 아니 써도 된디야.”

“못 감네다. 우리 엄니 두고 한 발자국도 못 나감네다.”

“동생은 아니 생각하니? 저 소굴로 동생을 다시 끌고 가겠단 말이네?”

“동생만 먼저 보내 주시라요. 내는 엄니 장사 지내고 따라가겠디요.”

“그렇겐 아니 된다. 이번도 겨우 잡은 기회다. 니 어머이, 아버이 목숨과 맞바꾼 것과도 같다 기래.”

“아버이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요! 내래 아버이 같은 거 없슴네다!” 해단은 소리쳤다. 

“누님…” 옆에서 자다 깬 명호는 불안한 눈빛으로 둘 사이의 대화를 듣다가 해단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명호야. 날래 짐 챙기래. 어머이 찾으러 가야지 아니 갔니.” 해단이 자신의 소매를 붙잡은 명호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맞잡으며 말했다. 

“근데, 명호야. 니 손이 와이리 떨리…”

그 순간 주위가 암흑으로 뒤덮였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불이 있던 곳을 쳐다보지만 장작불은 꺼져 있었다. 해단이 이게 무슨 일이냐고 말을 하려는 그 순간 누군가 해단의 입을 손으로 가로막았다. 익숙한 체취였다. 복면 쓴 이렸다.

해단이 자신의 입을 감싸고 있는 복면 쓴 이를 발견한 동시에, 그는 숨을 내쉬는 듯한 작은 소리에 말을 얹어 “쉿.”이라 속삭였다. 그리곤 자신을 바라보며 눈으로 욕하는 해단에게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자신의 입을 가로막은 손을 물어뜯으려 입을 벌렸던 해단은 그의 행동에 따라 반사적으로 잠시 멈추곤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듯하더니, 이내 주위에 발자국 소리가 듬성듬성 들려왔다. 인민군이었다.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선, 족해도 서너 명은 되는 듯했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숨 죽인 채 등 뒤의 나무들이 무성한 곳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용히 뒷걸음쳤다. 

한 손은 명호의 손을 쥐고 해단은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부터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뒤로 뻗은 다른 한 손에 나무 등치가 매만져졌다. 이동 시 나타나는 소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앞꿈치로만 발을 디디고 있던 해단은 몸을 안전하게 숨길 수 있는 곳에 이르렀단 생각에 긴장이 놓여 들고 있던 발뒤꿈치를 땅바닥에 내렸고 그 순간 해단의 뒷꿈치 아래에 있던 나뭇가지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저기다!” 

“잡으라우!”

“도망쳐!” 복면 쓴 이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족히 다섯 명은 되어 보이는 군인들이 앞으로 들이닥쳐왔다. 사방이 어두컴컴해서 좀처럼 누가 누군지 해단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오른손에 쥐인 손이 명호의 손인 것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작고 작은 손. 언제까지나 지켜주고 싶은 손이었다. 

해단은 명호의 손을 꼭 쥐고 소나무가 우거져 달빛 하나 들지 않는 숲 속으로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곳곳에 뻗어 있는 나뭇가지가 살갗에 긁히며 지나갔지만 따갑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간다고 살 수는 있는지, 걷고 걸어서 다시 북한이면 어떡하지.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들에 일일이 답을 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숨 쉴 틈조차 찾기 어려웠다. 

“누님.. 흐억.. 컥.. 내래 더 못 뛰겠슴네다..” 명호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뛰라! 잡히면…절대 곱게 못 죽는기래!” 해단이 말했다. 해단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이렇게 계속 뛰다간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인민군 손에 잡혀 수용소에 들어갈 바에, 어쩌면 차라리 그렇게 죽는 게 나을 거라고,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해단은 잠시 생각했다. 사람일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곳이었으니까.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그곳 어디에도. 

“누님…!!” 

명호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도 하기 전에 해단의 몸이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며 굴러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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