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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민 Oct 30. 2022

11.




“단아, 호야, 아랫집 리 씨네랑 윗집 강 씨네 헌티 소쿠리에 든 옥수수 좀 가져다주려무나. 하성 아부지, 다 깐 옥수수 좀 들고 오시요” 부엌에서 송연이 말했다. 

송연의 목소리에 마당의 평상 위에 있던 해단, 명호, 하성의 고개가 동시에 부엌 입구로 향했다. 세 사람은 둥글게 둘러앉아서는 저마다 한 손에 옥수수 하나씩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그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다. 아궁이에서 피어 나온 듯한 새하얀 수증기는 부엌 입구를 지나 드높이 솟은 하늘을 향해 뭉게뭉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해단은 아궁이의 수증기를 보곤 송연의 입에서 입김이 나오는 상상이 떠올라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잠시 조용히 웃음 짓다가, 이내 두 눈을 감고 부드럽게 턱을 위로 저치곤 숨을 들이마셨다. 해단은 메마른 입 속에 거의 없는 침을 꼴깍 삼키며 괜히 입맛을 다셨다. 마당 가득 퍼진 옥수수 냄새에서 달달한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머리칼을 매만지는 듯한 다정한 바람결에 감은 눈을 떴을 때, 해단의 시야에 들어온 건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란 가을 하늘이었다. 옆에선 옥수수 껍질을 까다가, 옥수수수염 속에서 갑작스레 우수수 떨어져 내린 벌레들로 인해 한껏 소란스러웠지만, 그 소란마저도 정다웠다. 해단은 청청한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 사이로 소리 없는 탄성을 내쉬었다. 


 “얼래들요, 와그리 앉아있슴네까. 길티 말고 날래 오고 아니 가져 간깐? 글믄 옥수수고 강냉이고 암 것도 없으렸디요” 기다리다 못해 뛰쳐나온 송연이 말했다. 송연의 왼손에는 옥수수로 가득 찬 소쿠리가, 다른 한 손에는 짙은 갈색의 긴 나무젓가락 한 쌍이 쥐어져 있었다. 마치 이를 악물은 모양처럼 야무지게 꽉 움킨 송연의 두 손을 보아하니, 당장 송연 앞으로 달려가지 않으면 매섭게 불어 들 송연의 꾸지람이 마당의 평상을 뒤엎을 기세였다. 

해단은 어서 명호를 데리고 가려 옆을 돌아보았지만, 빈자리만 횅하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하성과 눈을 마주치며 명호는 어디 갔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내자, 하성은 어깨를 들썩이며 고갯짓으로 해단의 뒤편을 가리켰다. 다시 몸을 돌려 앞을 보니, 명호는 이미 송연의 앞에 서 있었다. 

“누님, 날래, 오시라요.” 뛰었는지 헉헉 거리며 명호가 말했다. “오늘, 배 터지게, 옥수수 먹어야 하지 않슴네까!” 

“아하 녀석, 내래 못 말리겠다야.” 송연이 명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헝클이며 말했다.  

“기래, 날래 가자.” 해단이 명호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해단의 얼굴에는 웃음이 활짝 피어 있었다. 

“누님, 날래 안 오시고 뭐함네까.” 

“기래, 날래 와라 해단아.” 

이상했다. 해단이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명호와 송연에게로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하성에게 이게 어찌 된 일인지를 물으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철저한 암흑만이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해단이 다시 앞을 돌아보았을 땐, 명호와 송연은 사라지고 없었다. 해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차츰차츰 사라져 갔다. 눈에서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시야가 온통 흐렸다. 그러나 해단은 기어이 울음을 삼켰다. 여기서 울면 사라진 가족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들의 부재를 꼭 인정하는 꼴이 될 것만 같았다. 

“어머이요, 아바이요, 명호야, 다 어디갔슴네까..!” 해단은 뛰기 시작했다. 이마에선 쉴 새 없이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이내 얼굴에 흥건해졌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들이 땀인지 눈물인지, 해단은 알 수 없었다. 

“다 어디갔슴네까. 어머이, 아버이, 리명호..!!” 간절한 부름에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주위에 가득 퍼져있던 암흑이 금방이라도 삼켜내 버릴 듯이 해단이 서 있는 자리로 점차 에워싸 들기 시작했다. 해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봐. 동무.”

“……”

눈을 질끈 감고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해단의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나는 소리인 듯했다. 

“동무.” 

입에서 나온 입김이 닿기 직전 공중으로 흩어지고 간신히 목소리만 가닿는 거리. 

해단은 다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굴은 여전히 땀과 눈물이 흥건했다. 싸여 들어오던 어둠은 벌써 해단의 발치 아래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해단의 숨이 불규칙해져 갔다. 

그때 해단의 얼굴 위로 똑.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해단이 움찔 거리며 고개를 들자,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왕창 쏟아져 내림과 동시에 해단은 잠에서 깨어났다. 


“동무. 정신이 드요.” 누군가 해단의 앞에 쭈그려 앉아 물이 뚝뚝 흘러져 내리는 손을 엉거주춤 들고선 반색하며 묻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누님..!” 다른 누군가가 해단을 와락 껴안았다. 명호였다. 명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해단은 무의식적으로 안긴 명호의 등을 토닥이면서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잠시 멍하다가, 좀 전의 상황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며 명호를 꼭 껴안았다. 마음이 쉴 틈 없이 죄어듦과 동시에 자꾸만 몸 바깥으로 달음박질치려는 것만 같았다. 괴로웠다. 점차 명호의 눈물로 축축해지는 해단의 등과 달리 해단은 울지 않았다.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괴로웠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쪼그라듦과 동시에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늘에선 여전히 비가 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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