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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Oct 09. 2023

"너는 감정적인 사람이야!" 욕일까? 칭찬일까?

Emotion _ overall

"'팀장님은 감정적인 사람이군요' 누군가 팀장님께 이렇게 말했다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나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중반가량의 남자 팀장 A를 지명해 이렇게 물었다. 순간 A의 상체가 움찔하더니 이내 책상 앞으로 기울었다. 두 팔을 책상에 직각으로 세워 깍지를 낀 상태로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광대뼈에 홍조가 돌았다.


"글쎄요. 맥락을 따져봐야겠지만, 누군가 다짜고짜 그렇게 말한다면 좀 불쾌한데요?"

"이유는요?"

"보통, 우리가 타인에게 감정적이라는 말을 쓸 때는 이성적이지 못하다던지, 감정 관리를 못한다던지 그럴 때 쓰지 않나요?"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관리를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드리지요."

"팀장님은 이성적인 사람이군요. 이렇게 말했다면 어떠신가요?"

"반대의 이유로 나쁘지 않네요. 스마트하고 냉철한 사람이라는 뜻일 테니까요. 회사는 그런 사람을 유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다른 팀장님들께서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40여 명 남짓 참석자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H 대기업 팀장 워크샵에서의 일이다. 이를 주제로 한 추가 토론에서도 감정적이지 않은 이성적인 사람이야말로 회사 경영에 적합한 엘리트라는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총 4 차수 약 160여 명에 이르는 팀장집단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공돌이라 감성, 뭐 이런 거에는 쥐약인 사람이야."


한때 모셨던 CEO는 이런 말을 수시로 뱉었다. 그 말끝의 표정에는 감성적이지 못해 부끄럽거나 안타깝다는 감정보다는 외려 그 결여가 자랑(?)스럽다는 뉘앙스가 짙게 깔려 있었다. 아마도 스스로 명문대 공대 출신이면서 이 시대가 원하는 엘리트이자 감정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스마트하고 이성적인 경영자라는 은근한 자기과시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경영자로서 별로 치명적이지 않아 보이는 '감성결여'라는 단점을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덤이다...


16년간 직장인 생활을 하면서 접했던 대다수의 리더, 경영진들은 대체로 비슷했다. 스스로를 대단히 이성적이고 스마트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모나지 않은 인간성을 자신의 장점으로 앞세우거나 부하직원과의 정서적 교감을 강조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특히 남자, 중년,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성적이니 감정적이니라는 평을 한다면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일 확률이 높다. 


반면 누군가 "사장님은 이성적이시네요"라고 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내심 기분이 좋아지거나 우쭐해질 것이다. 스마트하고 이성지능 역시 높은 유능한 경영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테니 말이다.


재밌는 사실은 감성 역시 지능의 한 종류라는 점이다. 감성지능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기분, 정서, 기질을 포착해 감정 관리에 능하고 이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맺어 나가기 용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감성적, 감정적이란 평이 무작정 부정적인 뉘앙스로 통용될만한 개제도 아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네 리더들은 왜 이성지능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감성지능에 대해서는 이토록 무지한 데다 무감각한 것일까?




이쯤에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 번째는 감성지능이란 대체 무엇이며, 이성지능 중심 사고는 정말 경영에 도움이 될까?라는 궁금증


우선, 감정과 감성의 차이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감정적이라는 단어와 감성적이라는 단어는 쓰이는 의미 자체가 조금 다르다. 대개 감정적이란 표현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정적 감정을 쉽게 드러낸다라는 말로 쓰인다. 감성적이라는 표현 또한 이성적인 면보다 정서적 면이 더 부각된다는 뜻으로 회사 조직에서라면 이성적이라는 말 대비 유약하다는 뜻으로 들린다. 역시 부정적 뉘앙스가 더 강하다. 사실상 우리의 현실에서 쓰임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하는 중립적 개념에 가깝다. 크게 보아 감정은 감성지능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속하는 개념으로 이후 글에서는 감성≥감정의 관점에서 혼용해 사용할 것임을 미리 밝힌다.


하버드대 교육심리학과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하워드 가드너는 인간의 지능이 다음의 8가지 지능으로 구성된다는 다중이론을 창시했다.  

다중지능_하워드 가드너


다중지능 이론에 따르면 언어, 논리수학 두 가지 지능은 우리에게 익숙한 IQ에 연결된다.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이른바 '국영수+과'에 해당한다. 신체운동, 음악, 공간지능은 각각 체육, 음악, 미술이라는 예체능으로 분류되니 다중 지능의 5가지 영역을 학교에서 모두 교과목으로 다루고 있는 셈이다. 


하워드 가드너는 감성지능이야 말로 모든 지능의 우두머리라고 주장했는데, 감성지능은 자기성찰지능, 인간친화지능으로 구성된다. 이쯤 되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감성지능 부족을 부끄럽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여기는 경영진들이 수두룩하다는 현실을 이미 목도했지 않은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역시 현저히 떨어지는 자들이 우리 기업의 리더 위치에 수두룩하다는 반증 아닌가? 이게 사실이라면 심각한 시그널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회사 조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초중고 교육현장부터 뛰어난 인성을 배양하는 배움의 전당이라기보다는 그저 명문대를 가기 위한 점수 따기의 장으로 전락했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며 우정을 쌓고 희생과 양보를 배우는 대신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이동해 옆자리 친구는 경쟁자가 되어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극한 레이스에 내몰린 지 오래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에 입학하면 다를까? 끔찍한 경쟁을 끝내고 드디어 자신만의 꿈을 찾아 마음을 다해 과정을 좇고, 먹고사는 1차원적 욕망을 넘어 더 고차원의 가치를 향해 정진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배움이 가능해졌을까? 이미 그 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꿈은커녕 당장 취업에 급급해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다. 대학 생활은 이미 좋은 직업 찾기 게임이 되어버린 지 오래고 IMF 환란 이래 지속된 취업난은 수많은 청년들을 묻지 마 취업의 무한 경쟁으로 내몰았다. 그 과정에서 그저 주어진 정답을 줄줄 외우고 빠른 시간에 답을 찾아 맞추는데 특화된 이들이 줄 세우기를 통해 엘리트로 추앙받고 질문과 정의, 과정의 중요성, 행복 따위 더 고차원의 가치는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회사라고 다를까? 크고 작은 우리 기업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이라는 태생적 명분을 앞세워 인간성, 감성적 접근 따위 됐고 숫자, 데이터에 입각한 극단적 이성중심 경영이 유일한 정답인양 운영되어 왔다. 이들이 원하는 엘리트 프로파일 역시 IQ 높고 공부 잘하는 소위 고스펙자로 굳어졌다. 자연히 회사의 고위 경영진과 리더 그룹 또한 하나같이 고스펙이지만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인간미라고는 없는 사람들로 꽉꽉 채워지다시피 했다.


물론 이들 엘리트들은 고도의 성장기를 거치는 동안 큰 기여를 했다. 근면성실이라는 기치하에 생산성과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였던 제조업 중심 굴뚝산업 사회에서 이미 검증된 정답을 외워 빨리 내놓는 능력은 적절했다. 새로운 생태계와 기회를 만들어내지는 못해도 선도자가 만들어 놓은 리퍼런스를 빠르게 베껴 적어도 버금가는 수준으로 만드는 일에는 능했다.


문제는 이제 판이 바뀌었다는 데 있다. 새로운 기준, 질서, 상상력과 창의력이 요구되고 이전에 없던 그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선도하고 선점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이른바 뉴노멀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이전까지 별다른 의심 없이 통용되었던 기준, 정답, 정의가 모두 무용지물이 될 판이다. 3년간의 팬데믹을 거치면서 이게 될까? 싶었던 것들이 실제 현실화되고 완전 재택근무를 경험하면서 '이렇게도 일이 되는구나?'라는 신세계도 알아버렸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조직구조에 철저히 가려져 있던 인재의 옥석 역시 가려졌다. 능력은 없으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고인물들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이미 주어진 정답을 달달 외워 맞추는 능력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상상해 내고, 질문을 하고, 전에 없던 무언가를 연결하는 능력이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됐다. 엘리트에 대한 정의가 본질적으로 바뀌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핵심에 이성지능이 아닌 감성지능이 있다. 오늘날 우리 일터가 전쟁터가 된 이유는 바로 감성, 감정에 서투른 이성중심 엘리트들에 있는지도 모른다. 


"CEO들은 뛰어난 지능과 경영능력으로 고용되지만, 감성지능 부족으로 해고된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겸임교수이자 EQ연구의 권위자 다니엘 골먼은 단언한다. 여전히, 혹시나 이전의 이성중심 엘리트주의에 미련이 남는다면, 다니엘 골먼의 저서 [감성지능 EQ]를 정독해 볼 것을 권한다. 


물론 한 조직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CEO가 일개 구성원들과 가까이서 소통할 일이 얼마나 있겠나? 싶겠지만 파타고니아, 스타벅스, 탐스슈즈, 자포스, 슈프림 같이 엄청난 팬덤을 거느린 가치중심 기업들의 공통점 역시 고객은 물론 구성원들과도 끈끈한 정서적 교감으로 강력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오늘날 기업과 경영진들이 갖춰야 할 기본 중 기본은 감성지능이라는데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두 번째 의문, 정말 감정을 배제한 이성적 사고와 판단이 가능하긴 한 걸까?

준합리적 경제이론(Quasi-rational economic theory)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심리학자로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판단이 반드시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수많은 실험을 통해서 증명해 냈다. 


이를테면 맑은 날 이성의 전화번호를 딸 확률이 흐린 날 보다 두 배 이상 높다거나, 가석방 여부를 심사하는 법관들의 가석방 허용률이 점심식사 전과 후를 비교해 2~30% 이상 유의미한 차이를 보인다는 실험 등 인간의 감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외부 요인으로 인해 의사결정이 달라지는 구체적 사례를 밝혀낸 실험결과는 얼마든지 있다. 


뇌과학자이자 감정 연구가인 리사 팰드먼 패럿 역시 구성된 감정 이론(theory of constructed emotion)을 통해 인간의 감정은 내외부 감각으로부터 전달되는 각종 감각을 재료로 대뇌의 감정 생성 매커니즘인 정동적 적소, 내수용 interoception 신경망을 거쳐 만들어지고, 그렇게 생성된 감정상태는 현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리사는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성적 의사결정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못 박는다. 인간이 배우고 학습하는 일 자체가 과거 경험했던 상황을 종합해 감정 신호와 함께 장기기억에 담아두고 필요할 때 소급 적용하는 과정임을 감안하면 현재의 판단에 과거의 감정이 끌려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전히 "나는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합리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집과 자기기만에 빠진 융통성 없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고, 백번 양보해 기능적으로 그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감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의 감정에도 이입을 하지 못하는 문제적 존재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쩌면 최초의 인간 A.I가 탄생한 기적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사회 속 한 부분에 속한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감성지능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나 스스로를 나르시시스트로 소개한 글을 쓴 적도 있다. 공식적으로 판정받은 건 아니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그 이전의 나를 진지하게 돌아볼 시간과 기회가 넉넉히 생기자 스스로의 민낯을 발견한 경우랄까? 이불킥을 수도 없이 해야 했던 지난날의 부끄러운 모습들. 그 어떤 학자들의 논리나 사례들보다 내가 직접 깨달은 스스로에 대한 무지의 자각은 감성지능의 중요성을 깊게 각인시켰다. 나 자신에 대해 바로 아는 것과 타인에 대해 긍휼감을 가지는 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첫 번째 단추임을 말이다. 


이제 관계에 관한 한 기존의 답들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가 됐다.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성적 판단이란 게 가능하긴 한 걸까? 감정이 섞이지 않은 이성적 판단은 정말 옳은 걸까? 그렇다면 오늘날 왜 수많은 직장인들이 일터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마지못해 먹고살기 위해 꾸역꾸역 직장을 다니고, 회사는 전쟁터라는 끔찍한 단정들이 돌고 있는 것일까? 감정을 억압하고 죽이는 일이 마치 현명한 것인 양 만연한 조직, 인간미라곤 없는 날카롭고 냉정한 이성중심의 엘리트들로 돌아가는 회사, 정말 괜찮을까? 언제까지 나를 죽이고 주체성을 감추고 모난 고유성을 둥글게 깎아 부품화 시켜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을 절제하는 목적은 균형이지 억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 마음대로 발산하라는 게 아니라 제 감정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는 의미다. 


[감정이라는 세계]를 쓴 레온 빈트사이트 역시 "사회가 감정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정신에 막대한 해악을 끼친다" 고 주장했다.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또한 회사의 지속가능한 경영에 필요한 세 가지로 '사랑, 겸손, 인간애'를 거론하며 파트너(직원)과 고객과의 강력한 정서적 연결을 강조했다. 


이성지능이 필요 없거나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기업 현장에서 의사결정과정의 판단을 뒷받침할 숫자와 데이터, 이성지능은 중요하다. 다만 그동안 지나치게 이성지능중심으로 기울었던 엘리트의 사회적 정의와 역량 판단의 무게추를 감성 쪽으로 끌어와 균형을 맞춰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 라며 그저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조직을 만들자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평등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끈끈한 연대감 속에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강한 조직을 만들자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좋은 분위기와 성과는 자연히 따라올 일이다. 


무엇보다 '감정적'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표출하는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적절하게 컨트롤할 줄 아는 긍정의 의미로 쓰여야 옳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자기 인식 self awarness 이야말로 모든 관계를 시작하는 첫 단추다.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객관적 인식,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100%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경각심. 내 감정이 어떤지 알아볼 수 있는 메타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다음은 자기 통제 self control 다.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인지했다면 그 감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할 것인지 깊이 있는 고민과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타인에 감정이입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감정이입은 감성지능의 핵심이다. 나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타인은 어떤가? 스스로에 적용해 시뮬레이션해봄으로써 마치 내 경우처럼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바람직한 사회적 인식 social awanress이 생성되고,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관계관리 Social network에 대한 구체적 실행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감정을 이해하고 다스리는 일의 중요성. 단언컨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다. 한 사람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지는 그의 감성지능이 얼마나 높은지, 즉 감정을 얼마나 잘 통제하는지에 달려 있다.

[하버드 감성지능 강의]


밑 MEET의 두 번째 키워드인 Emotion은 사실상 우리 경영현장에서 외면되다시피 한 가치였다. '한번 쯤 일해보고 싶은 회사'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임에도 이성지능 신화에 빠져 오랜기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 면에서 감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해 가는 과정은 마치 잃어버린 왕국의 고대 유적을 찾는 모험처럼 흥미진진했다. 


자 이제 더 깊이 있는 감성의 세계로 함께 떠나보자. 어렵지 않다. 인간에 대한 애착과 관심 그것만 붙들면 된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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