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좋은 긴장감. 하얗게 불살랐다
③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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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출발한 지 약 1시간 40분 만에 익산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였던 건지, KTX가 빨랐던 건지 조금은 놀란 마음으로 역사를 빠져나왔다
익산역은 난생처음
역전 광장은 깔끔했고 지방 중소도시의 소박한 안락함? 이 느껴졌다
8시, 주최 측에서 준비한 차를 얻어 타고 연구원 청사로 향했다
담당자 대신 마중 나온 수행직원과 인사를 나누고
연구원의 분위기, 조직문화 따위를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며 내심 놀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극내향형인 주제에 외향형 인척, 친화력이 높은 척 애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못 참는 편인 데다, 강의를 앞두고 목을 가다듬는다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장소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마주한 담당자는 땀투성이였다.
7월 발령 후 난생처음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이라 서툴다 했다.
행사시간은 다가오고 이리저리 정신없는 모습을 보니 직장인 시절의 내가 떠올라 마음이 몽글해진다
'그래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조직문화와 육성 업무를 맡은 10여 년간, 대표 이하 전 직원이 참여하는 전사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할 때면 괜히 바쁘고 분주하고 신경 쓸 일 많아 예민해지지 않았던가?
"아이고 작가님 멀리서 오셨는데, 커피 한잔 챙겨드리지도 못하고..."
"아닙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행사 준비부터 마무리하세요"
전전긍긍, 그 마음을 알기에 담당자 손에 가득한 준비물을 나눠 들고 함께 강의장으로 향한다
10여분 정도 예정되어 있던 원장과의 티타임도 취소됐다
강의장 정면으로 현수막이 걸려 있고 의자가 빼곡히 세팅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왜 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기 행사였는데, 각자의 위치에서 분주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니, 간만에 현장의 텐션과 생동감이 온몸으로 전해져 온다
"작가님 여기 커피 한잔 드세요"
담당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건넨다. 평소 라떼를 마시지만 일단 받아 들고 한 모금 맛본다. 쓴 커피의 맛과 향이 오감을 자극한다
시간이 임박해 주최측은 각 부서에 전화 독려를 한다.
"어 김주임. 원장님 곧 오실 거 같으니까. 빠짐없이 참석 독려해 달라고 어, 그렇지 응~부탁해"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와글와글, 웅성웅성
잠자코 있던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커피의 카페인 때문인가? 특강 전 긴장감 때문인가?
현역시절부터 수백 번이 넘는 강의, 특강, 워크숍을 진행해 왔지만 시작 전의 두근거림은 여전하다
이전엔 그 느낌이 부담스럽고 싫었는데, 지금은 뭔가 좀 다르다
기분 좋은 긴장감
원장님과 임원들이 등장해 자리에 앉자. 장내가 조용해진다. 식순에 따라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10분 요가강좌, 우수 직원 시상, 신규 전입자 소개 순으로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건강한 조직을 만드는 네 가지 펀더멘탈. 밑 MEET 다지기'
특강이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조직과 사람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글이라는 하드웨어에 담는 일을 하는 이xx 입니다"
준비된 자기소개와 함께 7년 전 우연히 들러 비빔밥을 먹고 갔던 연결고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본론은 밑 MEET 빠짐을 시각화해 보여주는 종이컵 퍼포먼스부터다
종이컵을 들어 밑바닥을 뚫고 준비된 생수를 붓는다
바닥으로 물이 줄줄 새자 청중의 관심이 집중된다
"왜 밑 빠진 종이컵에 물을 부을 땐 어어~ 말리면서, 밑 빠진 회사에 인풋(돈, 시간, 사람)을 쏟아부을 땐 아무도 말리지 않을까요?"
1시간 30분의 시간이 훅 지나갔다
강의를 시작하고 10분이 지나면 마치 타임워프라도 한 듯 시간 감각이 사라진다
완전히 강의에 몰입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불과 1시간 30분 만에 목은 잠겼고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듯 온몸의 힘이 빠진다
다행히 청중의 반응은 괜찮아 보였다
출근시간을 조금 넘어선 오전, 지루한 조직문화를 주제로 한 강의였음에도
졸거나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대치의 90% 이상은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이른 아침인 데다 조직문화 강의라 지루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담당자는 배웅을 하며 속내를 털어놨다
걱정이 있었지만 청중 호응도 괜찮았고 내용도 의미 있었고
무엇보다 생각보다? 는 지루하지 않았다는 평
점심을 함께 하자는 권유를 물리치고
익산역으로 향했다
오기 전 미리 알아봐 둔 맛집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다
다시 수행직원과 익산역으로 가는 길,
오전보다 더 어색하다. 힘이 빠졌는지 더는 할 말이 없어서였는지
올 때와는 다르게 침묵이 이어진다
강의 말미에 QR코드로 받은 강의평가 결과를 확인한다
스스로의 만족도와는 별개로
객관적 진실은 예상에서 조금 빗겨있다
'매우 추천'지수가 53.8%로 응답자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나머지는 모두 '추천'이다
비록 '매우 비추천' '비추천'이 단 한건도 없었지만
기대가 너무 높았던 탓일까?
주관식 평가 대다수는 긍정적인 언급이지만
부정 언급도 조금 있다
'지루한 면도 좀 있었지만...' '중간에 조금 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용했다는 긍정 평가로 마무리가 됐지만
찝찝함이 남는다
공공기관 특성인지는 몰라도 외부 인터넷 연결이 안 되어
준비해 간 온라인 퀴즈를 포기한 점이 걸렸는데
여지없다
익산역 앞에 내려
밥집을 찾아 헤맨다
이런, 맛집으로 알려진 백반집 모두 1인은 안된단다
하필 하늘은 땡볕이다
강의로 체력이 소진되어 머리가 빙글 돈다
쓰러지기 직전 가까스로 1인 식사가 되는 곳을 찾아
자리에 앉는다
백반인데 한정식처럼 펼쳐지는 남도 백반의 면면
시원한 물을 들이키니 비로소 정신이 돌아온다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치고 차분히 강의평을 다시 들여다본다
이제보니 아픈 평가가 더 반갑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던가
겸허히 인정하고
다음 강의에 반영하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 자신감도 생긴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백반 맛음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