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인생은 잔잔한 강물 같군요.”
얼마 전 보건소에서 제공하는 무료 스트레스 지수 테스트를 했더니 이런 글귀가 나왔다.
‘잔잔한 강물이라고? 핵폭탄이나 활화산이 아니라? ‘
30점 만점에 5점이라는 낮은 편에 속하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스스로 예민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산 것 치고 점수가 높지 않았기에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감정을 쌓아두지 않고 표출하는 성격 덕에 고민이 덜하나 싶기도 하고. 예민함과 스트레스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기분이 좋을 때 감정을 억누르는 일은 나에게 불가능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세포가 파파팍 터지며 얼마나 신났는지를 몸으로, 말로 그리고 제스처로 표현하고 싶어 참을 수 없다. 다음은 최근에 있었던 나의 상황을 소개해 본다.
ⓛ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사방에서 파릇파릇한 새싹과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오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흥얼흥얼 콧노래와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주위 사람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② 냉면을 먹는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비빔냉면의 톡 쏘는 매운 양념이 정말 맛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며 한입 먹을 때마다 맛있다고 말한다. 친구는 너무 호들갑스러운 거 아니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③ 반가운 사람을 만난다. 유학 시절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다. 저 멀리 길 끝에서 그가 조그맣게 보이는 순간부터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단숨에 달려가 얼싸안고 좋아한다. 신이 나서 소리를 질러보기도 한다. 친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칭찬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행복하다. 표현할수록 내 기쁨은 더 커진다.
기쁠 때 주체하지 못하듯, 화가 나면 정신을 못 차리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나의 화내는 방식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부글부글 참던 것 한 방에 터져버린다. 크고 작은 상황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쌓였다가 터지는 것이다. ‘저 정도로 화낼 일이야?!’라는 주위의 반응에 더욱더 괴팍하게 폭발한다. 화내는 시간은 짧은데 그 여운, 그러니까 행동의 결과는 상당히 오래가고 꽤 파괴적이다. 인연을 끊어야 하기도,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일에서 손을 떼야하기도 했다. 몇 번의 경험으로 화나는 감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터득한 방식이 ‘참지 말자’이다. 화를 안 참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편한 느낌, 신경 쓰이는 느낌 그리고 싫은 느낌을 참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야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고, 화를 낸다고 해도 건강하게 내는 범위에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예컨대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을 은근히 비꼬는 사람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뭔가 기분 나쁜데 분위기는 깨기 싫고 ‘할많하않’ 상태를 유지하자니, 내 안의 마그마가 부글부글 안달이 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분위기’를 지키기보다 ‘나’를 지키기를 택한다. 기분이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바로 “누구누구 씨가 말할 때마다 이상하게 기분이 불편해요. 제가 뭐 실수한 게 있나요?”라던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저한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겠네요. 부탁할게요”라던가. 느낀 바를 무례하지 않게 단어도 신중하게 선택하여 내 기분을 그대로 전달한다. 웃는 얼굴과 ‘ㅅ’자 눈썹은 필수다.
물론 때때로 더 큰 오해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하하 호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는 점은 감수해야 하지만, 적어도 내 안의 용암이 더는 부글거리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잘못을 감지했을 때는 체면 차리지 말고 깍듯하게 사과해야 한다. 감정에 솔직하게 대응하면서 결과적으로 큰 화로 발전하는 일이 줄었다. 최근 십 년간 크게 화를 내 본 적이 없는 이유다(남이 볼 때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사회생활 고수들은 분위기까지 지키겠으나 필자는 아직 하수라서 이 정도라도 실천할 수 있음에 만족한다.
스트레스 지수 글귀처럼 기쁜 감정, 슬픈 감정, 화나는 감정, 행복한 감정,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감정의 주체로서 차분하게 바라보고, 안 좋은 것은 스르륵 흘려보내며, 좋은 것은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잔잔한 강물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 나아가 주위 사람에게도 나의 잔잔함이 전해지도록 성숙하게 감정을 표현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