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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스키 Mar 25. 2022

잔잔한 강물처럼

“당신에게 인생은 잔잔한 강물 같군요.”


얼마 전 보건소에서 제공하는 무료 스트레스 지수 테스트를 했더니 이런 글귀가 나왔다.


‘잔잔한 강물이라고? 핵폭탄이나 활화산이 아니라? ‘


30점 만점에 5점이라는 낮은 편에 속하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스스로 예민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산 것 치고 점수가 높지 않았기에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감정을 쌓아두지 않고 표출하는 성격 덕에 고민이 덜하나 싶기도 하고. 예민함과 스트레스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기분이 좋을 때 감정을 억누르는 일은 나에게 불가능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세포가 파파팍 터지며 얼마나 신났는지를 몸으로, 말로 그리고 제스처로 표현하고 싶어 참을 수 없다. 다음은 최근에 있었던 나의 상황을 소개해 본다.


ⓛ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사방에서 파릇파릇한 새싹과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오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흥얼흥얼 콧노래와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주위 사람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② 냉면을 먹는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비빔냉면의 톡 쏘는 매운 양념이 정말 맛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며 한입 먹을 때마다 맛있다고 말한다. 친구는 너무 호들갑스러운 거 아니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③ 반가운 사람을 만난다. 유학 시절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다. 저 멀리 길 끝에서 그가 조그맣게 보이는 순간부터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단숨에 달려가 얼싸안고 좋아한다. 신이 나서 소리를 질러보기도 한다. 친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칭찬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행복하다. 표현할수록 내 기쁨은 더 커진다.


기쁠 때 주체하지 못하듯, 화가 나면 정신을 못 차리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나의 화내는 방식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부글부글 참던 것 한 방에 터져버린다. 크고 작은 상황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쌓였다가 터지는 것이다. ‘저 정도로 화낼 일이야?!’라는 주위의 반응에 더욱더 괴팍하게 폭발한다. 화내는 시간은 짧은데 그 여운, 그러니까 행동의 결과는 상당히 오래가고 꽤 파괴적이다. 인연을 끊어야 하기도,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일에서 손을 떼야하기도 했다. 몇 번의 경험으로 화나는 감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터득한 방식이 ‘참지 말자’이다. 화를 안 참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편한 느낌, 신경 쓰이는 느낌 그리고 싫은 느낌을 참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야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고, 화를 낸다고 해도 건강하게 내는 범위에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예컨대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을 은근히 비꼬는 사람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뭔가 기분 나쁜데 분위기는 깨기 싫고 ‘할많하않’ 상태를 유지하자니, 내 안의 마그마가 부글부글 안달이 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분위기’를 지키기보다 ‘나’를 지키기를 택한다. 기분이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바로 “누구누구 씨가 말할 때마다 이상하게 기분이 불편해요. 제가 뭐 실수한 게 있나요?”라던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저한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겠네요. 부탁할게요”라던가. 느낀 바를 무례하지 않게 단어도 신중하게 선택하여 내 기분을 그대로 전달한다. 웃는 얼굴과 ‘ㅅ’자 눈썹은 필수다.


물론 때때로 더 큰 오해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하하 호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는 점은 감수해야 하지만, 적어도 내 안의 용암이 더는 부글거리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잘못을 감지했을 때는 체면 차리지 말고 깍듯하게 사과해야 한다. 감정에 솔직하게 대응하면서 결과적으로 큰 화로 발전하는 일이 줄었다. 최근 십 년간 크게 화를 내 본 적이 없는 이유다(남이 볼 때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사회생활 고수들은 분위기까지 지키겠으나 필자는 아직 하수라서 이 정도라도 실천할 수 있음에 만족한다.


스트레스 지수 글귀처럼 기쁜 감정, 슬픈 감정, 화나는 감정, 행복한 감정,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감정의 주체로서 차분하게 바라보고,  좋은 것은 스르륵 흘려보내며, 좋은 것은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잔잔한 강물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 나아가 주위 사람에게도 나의 잔잔함이 전해지도록 성숙하게 감정을 표현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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