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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촌 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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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VN Solo Nov 25. 2019

소소하고 뜬금없는 행복

이촌, 향도 (5)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원래라면 집 앞의 스타벅스나 폴 바셋을 갔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올 겨울 처음으로 기온은 영하로 내려갔으며 그에 따라 사둔 패딩을 처음으로 꺼내 입었다. 얼음을 얼릴 수 있을 정도의 차가움은 상쾌했다. 미세먼지가 없는 것도 상쾌함에 한몫했다. 좀 더 길을 걷다 보니 역 근처였다. 커피@웍스에 들어갔다.
 아직 오픈 타임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누나에게는 옷이 너무 많다. 그렇지만 신발은 잘 알아볼 수 있고 누나는 매일 신던 맥퀸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누나였다. 나는 누나를 유심히 보았지만 누나는 모른 채 했다.
 모른 채 한 게 아니라 정말 몰랐다. 웬 아저씨가 자꾸 쳐다보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조심해야겠다. 초췌하게 동네에서 으슥한 눈빛을 발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아무튼 누나를 이렇게 카페에서 만난 건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서로 가까운 유전자는 적당히 서로를 밀어내게 설계되어 있고 같은 동네에서도 놀더라도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오늘은 달랐다.
 '누나 나도 아침 사줘' 어제 독서 모임에서 먹었던 치킨이 아직 소화되지 않았으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메뉴는 아보카도 토스트. "야 나는 아껴가며 아침 먹는 건데." "나도 아끼려고 일부러 비싼 거 얻어먹는 거야."



 수영을 마친 누나는 공교롭게도 오늘 출근이 한 시간 늦어져 여유롭게 카페에 온 거였다. 오늘은 수능 날이었다.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은 이래서 좋구나 싶었다. 둘 다 자주 가지 않는 카페에서 만난 건 사소하지만 즐거운 우연이었다. 누나와 요즘 일상을 나눴다. 아무래도 야근이 잦고 생활 사이클이 달라 저녁엔 많이 이야기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카페에서 아침을 먹으니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 사람의 컨디션은 이렇게나 중요한 것이다.
 아홉 시 반이 되자 누나는 이제 출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다 먹은 접시가 담긴 트레이들을 정리하고 물을 받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책을 읽고 오늘이 마감인 글은 썼다. 즐겁다. 소소하고 뜬금없는 행복, 소확행의 시대에 간혹 이런 소뜬행도 찾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삶이 이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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