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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Apr 18. 2023

숲 속의 정치

hwain 단편선 (11)

"자, 시간 됐으니까 동굴 앞으로 모두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까치와 까마귀들이 목이 터져라 울어댔다. 토끼, 뱀, 닭은 이미 와서 앉아 있었고, 소와 돼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미적거린다.

저 멀리서 곰과 두더지가 천천히 기어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동굴의 초입에는 각 무리를 대표하는 사자와 호랑이가 한 마리씩 서 있다. 둘 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어색하게 웃는다. 인상이 비교적 더 좋아 보이는 늙은 호랑이가 시커먼 발바닥을 흔든다.


사자는 심기가 불편한 듯이 꼬리가 말려 들어간다. 어색한 두 맹수 사이로 삵과 표범이 넓적한 나무판자 뭉치를 쥐고 있다. 동굴 좌측의 나무 밑동에는 '거북이와 나무늘보는 기권'이라 쓰여 있다.


나이가 지긋한 코끼리가 일어나 큰 소리로 소리친다.


"모두가 알다시피 얼마 전, 우리들에게 믿을 수 없는 참사가 벌어졌지요. 투표에 앞서 다 같이 묵념합시다."


코끼리의 주름진 코에서 긴 호흡의 굉음이 터져 나온다. 순식간에 좌중이 숙연해진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고개를 떨군다.


"이 자리는 숲의 지도자를 뽑는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또, 지도자는 한 번 당선되면 죽기 전까지 숲을 통치하니, 여러분들도 신중한 선택을 해주시기 바라요. 그러면 거두절미하고, 각 당의 대표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코끼리가 발소리를 죽이며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자, 대표 호랑이가 다리를 절며 바위 위로 향한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호랑이당의 대표이자 정치 베테랑으로서, 여러분들께 딱 한 가지만 약속드리려고 합니다." 대표 호랑이는 말하면서 자꾸 양쪽 입에 말라붙은 침자국을 발로 훔친다.


"하늘 아래 더 강한 동물은 있어도, 더 소중한 동물은 없지요. 모든 동물들은 공평하고 평등합니다! 숲을 제게 맡겨주신다면 제 정치 생명을 걸고, 육식 동물들이 특정 동물이 아닌 모든 동물들을 공평하게 잡아먹는 숲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소와 돼지는 감동을 받았는지 눈물을 흘린다. 늑대와 여우는 서로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토끼와 노루들은 갸우뚱하더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대표 호랑이는 그제야 본인의 할 일을 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바위에서 내려온다.


순서를 이어받은 대표 사자가 바위 위로 올라가자 온갖 야유가 쏟아진다.


사자당이 지난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권력 다툼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사자당 쪽 사자들이 조용히 하라며 으르렁거린다. 맨 앞에서 가장 크게 야유하던 늑대가 깨갱댄다.  


다시 조용해진 분위기에 사자가 입을 뗀다.

“긴 말 않겠습니다. 제가 지도자가 되면 개체 수가 가장 많은 초식 동물부터 잡아먹는 ‘할당제’를 도입하겠습니다!“


모든 동물들의 표정이 얼어붙었지만 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아까 뭐라고 말했죠? 모든 동물들이 평등하다고요? 정말 가당치도 않습니다. 주위만 둘러봐도 토끼들이 돼지보다 훨씬 많고, 돼지들은 토끼보다 덩치가 훨씬 커서 고기도 더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 토끼 한 마리가 돼지 한 마리와 같겠습니까?“


사자가 호랑이당 방향으로 소리친다. 그리고 호흡을 들이켜더니 더 큰 소리로 소리친다.


“지금 호랑이당은 우리 숲 전체를 기만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토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한 마리가 일어서서 소리친다.


”옳소! 돼지 한 마리 무게는 우리 토끼 서른 마리는 될거요!“


그 말을 들은 돼지 한 마리가 억울한 표정으로 제 멱을 따는 소리를 낸다.


“뭐라고? 저 말은 너희한테 제일 불리한 말인데 왜 찬성하는 거야?“


“뭐? 기만이라고?”


이번에는 호랑이당에서 큰 소리가 난다.


그때, 갑자기 까마귀 한 마리가 멀리서 날아오며 말한다.


“산불이다! 산불! 도망쳐!”


그의 말대로 산 깊은 곳에서 뿌연 연기와 열기가 새어 나오고 있다.


동물들이 아연실색하며 마구잡이로 도망치고 있지만, 호랑이들과 사자들은 눈을 뜨기도 힘든 열기 속에서 서로를 물어뜯는다.


다음날, 숲 속은 조용했다.


새까맣게 탄 나무 위로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얀 재가 소복하게 쌓였다.


바닥에는 결국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가죽이  모두 다 타버린 호랑이와 사자의 검은 시체가 늘어져 있었다.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염소가 말했다.


“가죽을 벗겨 놓으니 누가 사자고, 누가 호랑인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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