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날의 4월 몇 주 동안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보다 좋은 때가 없었을 정도로 내 컨디션은 정말 좋았다. 집중력도 최상이었고, 머릿속에 각종 아이디어들이 넘쳐났다. 연구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도 넘쳐나서 아이패드에 계속해서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머릿속이 활발하게 돌아가기에 의욕도 넘쳤다. 뭘 해도 크게 피곤하지 않고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넘쳐났다. 아침 5시에 일어나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아침을 챙겨 먹기도 하고 출근하여 일을 한다. 몸에 에너지가 넘치는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이라도 우울이나 불안이 느껴지는 게 내 일상이었는데, 그러 기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런 일상은 처음이다. 토요일에 찾아가는 한글학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각종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영화나 드라마 속 한국 문화에 대한 특별 수업과 같은 콘텐츠에 대한 생각도 떠올라서 한 시간 동안 빼곡하게 콘텐츠 내용들을 작성하기도 했다. 한식 쿠킹 클래스에 대한 의욕도 넘쳐나서 새로운 제안서들을 가지고 한글학교 교장선생님을 만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좋았지만 한 가지 걱정이라면 잠을 너무 못 잔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잠을 3~4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 잠을 자려고 누워서도, 하는 일들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나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아 작업을 하곤 했다. 기분이 너무 좋고 잠이 부족해도 크게 피곤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저 기분이 정말 좋았다. 나는 이런 적이 없는데,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항상 나 자신을 의심하는 편이었다.) 정말 모든 게 다 좋았지만,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한다는 점에서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전문가와 상담이 필요하다 느꼈다. 한 달 전쯤 마지막 정신의학과 전문의로부터 진료를 받았고 다음 진료는 3개월 후였지만, 한 번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3개월 동안 이렇게 잠을 못 자면 분명 뭔가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그렇게 급하게 예약 진료를 잡으려 하니 빨라도 한 달 뒤였다. 프랑스어를 하는 연구실 동료(친구)에게 부탁하여 병원에 전화를 했다. 진료가 급하게 필요하다는 사정을 얘기하니, 2주 뒤 아침 8시 반 진료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렇게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이 되었다. 늦지 않게 병원을 찾아갔는데 조금 일찍 도착했다. 병원 안은 어두웠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열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단 벨을 눌러보았다. 누군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불어로 내게 뭐라고 하는데 예약에 관해 묻는 것 같아서, 내 주치의 이름을 말했다. 그랬더니 진료실 앞에 가서 앉으라 했다. 리셉션 담당자는 아직 출근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진료실 앞에 앉아 대기한다. 진료소 내에 다른 환자는 없는 것 같다. 조금 후에 내 담당의가 자전거 헬멧을 쓰고 백팩을 매고는 앞에 나타나서 나와 안사르 한다. 이제 출근인가 보다. 진료실로 들어가 준비를 했는지 잠시 후 밖에 나와 나를 부른다. 안에 들어간다.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에 요즘 내 상태에 대해 얘기한다. 한 달 전 진료 때 새로운 처방전을 주며 한 가지 약을 바꿨었다. 그때 이후부터 내 컨디션이 매우 좋았지만, 한 편으로는 그 진료 후쯤에 내 계약 연장도 이뤄졌었고, 여러 가지 스트레스받던 문제들이 해결되었었다. 그러니 일단 맘이 편해진 게 있었다. 의사가 말하길 그런 것들이 해결된 게 내 불안과 우울을 해소해 줬을 수도 있지만, 새로 바꾼 약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지금 내 상태는 약간의 조증 상태로 보인다고 했다. 나에게 전에도 이런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굉장히 에너지가 넘칠 때가 있기는 했었지만, 보통 3일 정도로 짧았고 이렇게 몇 주나 지속된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내게 혹시 가족 중에 Bipolar disorder로 양극성 장애를 겪은 사람은 없는지 물었다. 나에게 진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기질의 사람이 있는지 묻는다고 했다. 얘기를 들으며 생각지도 못한 "bipolar"에 조금 놀랐다. 내가 알기로는 진단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양극성 장애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며 양극성장애를 가진 경우 조기 사망의 위험이 더 커지며, 자살등의 비율도 더 높다고 했다. 죽음에 대한 얘길 듣자 문득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내가 너무 어릴 때라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할아버지께서 기차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얘길 들었던 것을 말했다. 일반적인 죽음이라 느껴지진 않았기에 얘기를 했다. 의사가 일반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며 동의했고, 이런 걸 묻는 이유가 새로 바꾼 항우울제에 의해 조증 상태가 된 것 같다고 말하면서 일부 사람들이 이렇게 더 약에 예민하게 반응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유전적인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고도 알려져 있기에 가족력에 대해 물어본 것이었다. 처방은 약을 바꿔야 하는데, 바로 끊어버릴 경우 급격한 우울 상태로 전환될 수 있으니 약을 줄이고, 추가적으로 안정제를 처방해 준다고 말했다. 이 안정제는 졸음을 유발할 수 있는데, 평일에 바로 먹지 말고 주말에 먼저 시험 삼아 복용하고 주중에 복용하라고 말했다.
처방전을 받아 들고 병원을 나오면서도 머릿속이 조금 복잡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상태가 없었는데, 조울증이라고 한다. 우울증은 어릴 적부터 언제나 가지고 살아왔으니 아무 생각 없지만 조울증이란 얘길 들은 건 처음이었다. 우울증이었다가 불안장애도 추가되었는데, 여기에 이제 조울증이 된다. 나는 어디까지 안 좋아질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우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의 기분이 5라고 하고 최상을 10, 최악을 0으로 둔다면 보통의 나는 3~6 정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이었지만 요즘은 6~8 정도의 상태였다. 처방전을 가지고 약을 타서 연구실로 출근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 약을 끊으면 원래의 우울 상태로 돌아가는 건가.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정상의 상태가 아니라 했지만, 나는 지금의 내가 좋았다. 하지만 이대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결국 원래의 나로 돌아가야 함을 알았다.
그렇게 바꿨던 약의 복용량을 줄이고 주말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소량을 먹고 그다음에 양을 늘리라고 했기에, 먼저 처음 복용하라한 양만큼을 먹었다. 그런 후, 거의 한 달 만에 7시간 가까이 잘 수 있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복용량을 늘렸는데, 월요일 아침부터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아침에 출근길을 걸어가는데도 마치 숙취에 길은 걷는 것 마냥 머리가 맑지 않고 내가 반듯하게 걸어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연구실에 있는 하루종일 머리가 멍했고 계속해서 졸음이 쏟아졌다. 그렇게 주중에 이틀을 얼렁뚱땅 비몽사몽 지내다 보니, 이렇게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약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치의에게 메일로 연락을 했다. 약을 먹고는 너무 졸음이 쏟아져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그렇게 메일을 보내고는 일단 처방받은 안정제를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았다. 보통 3일 내에 오던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대로는 약을 복용할 수 없었다. 이 약을 먹고는 일상을 지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안정제를 빼고, 나를 조증으로 만들었던 약도 사라지고, 이전에 먹던 약으로 다시 복용하기 시작했다.
의사로부터 답장은 한 달 뒤에 왔다. ("It is better to take a new appointment. Some people are very tired even with very small dosis of QUETIAPINE, but most of them experience less side effect with time. If it is still a probleme, take a new appointment to find Something better for you") 그렇게 새로운 예약을 잡으려 하니 또 한 달 뒤에나 가능했다. (프랑스에서 전문의 진료 예약은 쉽지 않다. 거의 모든 진료들은 예약해야 가능한 시스템이라 한국처럼 당일 전문의를 찾아가 진료를 받을 순 없다.) 그렇게 다음 달에 있을 진료를 기다리며 일상을 보냈다.
안정제를 끊으니 잠은 쏟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꿔서 내가 조증을 겪게 만들었던 항우울제를 끊고 (점차 줄인 후, 기존 약으로 다시 바꿈) 기존의 약으로 다시 돌아오니 나의 상태도 원래의 우울과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로 돌아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상에서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약 기운에 의해 잠을 잔다기보다는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가 없어서 침대르 벗어나기가 힘들어졌다. 다시 우울, 불안과 싸워야 하는 나로 돌아왔다. 기분이 좋을 대 벌려둔 것들이 다 기다리고 있었다. 해야 할 에너지가 부족해 벅차기만 하게 느껴진다. 연구실 출근도 종종 힘들어 급하게 아침마다 하루 휴가를 신청하곤 했다. 내가 있는 연구소는 사이트에서 휴가를 신청하면 그게 내 보스에게 전달되고 보스가 최종 승인해 주는 시스템이다. 딱히 사유 같은 것을 쓸 일은 없고 신청하면 항상 다 승인해 주긴 한다. 하지만 너무 잦게, 그리고 미리 신청이 아니라 당일 신청한다는 사실이 점점 신경 쓰이곤 했었다. 그렇게 5월을 엉망진창의 컨디션으로 보냈다. 이것저것 하면서도 언제나 힘겨웠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많았고, 그저 살아가야 할 일상들이 지겹기만 했다. 다시 조증의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그 약을 다시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잘못된 생각들도 했다. 조증 상태의 나는 에너지가 넘쳤고 긍정적이었고 삶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내가 바라던 나의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라면 내가 원하고 하고자 하는 일들을 다 이룰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진짜 나는 아닌 것이다. 그건 약에 의한 나였다. 그리고 거기엔 문제가 있었다.
약이 아닌 나의 힘으로 나 자신과 싸워가며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이게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