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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확위 Jul 14. 2024

할 수 있는 것 하나하나 해치우기

컨디션이 좋지 않았었기에 해야 할 일들이 닥쳐오는 게 모두 부담으로 다가왔다. 연구실에서의 실험이 너무나도 더뎌서 진전이 없었기에 앞으로 진로에 대한 얘기조차 보스에게 꺼내지도 못하고 계약 종료가 다가오고 있다. 앞날이 불안해지니, 원래도 불안장애를 가지고 있는 나의 상태는 당연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연구실에서도 실험을 하다가 막힐 때면 숨이 막히며 답답해졌고, 매일 출근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상이 그저 힘들기만 했다. 이때쯤이면 연구가 모두 끝날 거라 생각하고는 계획을 잡아뒀던 이런저런 일들이 갑자기 압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든 게 버겁게만 느껴져서 혼자 주말 내내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있는 친구와 연락을 했다. 내가 이러저러해서 힘들었다는 얘기를 하니, 친구가 연구가 가장 중요하다면 그거 외에 나머지 것들은 그냥 다 취소하라고 했다. 힘들다면 자기 자신부터 챙기는 게 당연한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제안해서 시작하게 된 행사도 있었기에 내가 빠져버리면 많은 이들에게 민폐라고 생각되었다. 친구는 너 하나 빠져서 안 되는 행사라면 행사자체의 문제라고도 했지만, 이걸 취소함으로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며 나 자신이 더 싫어질 것 같았다. 마음을 어떻게든 다 잡고 해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일주일 후에 일주일 휴가를 써야 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지만, 3개월 전에 잡아뒀던 계획으로 국제장애인행사에 한국인 선수들을 돕는 일로 자원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쯤이면 연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여유가 넘칠 거라 생각했기에 계획해 둔 일이었다. 지금은 여유가 없는 상황이지만 이미 담당 선수도 배정받았고, 이제 와서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기에 일주일 후에 연구를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이번 주 중에는 내가 있는 도시의 연구원 커뮤니티에서 한국의 행사를 하기로 했었다. 내가 제안했던 거다. 제안할 당시만 해도, 내가 여유 있을 줄 알았었다. 내가 곧 계약이 끝나고 떠날 수도 있으니, 그전에 한국의 날 행사를 하면서 한국요리하는 것을 돕고 싶다며 내가 시작한 일이었다. 30인분의 요리를 준비해야 했다. 메뉴도 짜고, 계획도 세우고 장도 보고, 요리도 해야 했다. 게다가 2주 후에는 그룹미팅에서 논문 발표도 해야 했다. 아무리 여러 논문들을 살펴봐도 마땅히 맘에 드는 논문을 아직도 찾지 못해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제대로 진행되는 게 없는 느낌에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언니와 카톡을 했다. 언니가 힘들 수 있다고.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무 힘들 땐 언제든지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맘이 한결 편해짐을 느꼈다. 연구가 잘 안돼도 괜찮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노력만으로 연구 결과가 보장되는 건 아니다. 안될 수도 있는 거다. 안된다고 해서 내 인생이 실패인 것은 아니다. 인생에는 많은 길이 있음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거다. 그 후의 결과에 따라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가면 되는 거였다. 조금은 머릿속이 맑아졌다.


한 주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루 하루 해나가야 할 실험 계획들을 세웠다. 그런 후, 한글의 날 요리를 위해 메뉴를 짜고, 장을 볼 리스트를 작성하고, 요리 순서까지 모두 정리했다. 정리해 두고 살펴보니 모두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2주 뒤의 발표에 대해서는 조금씩 다시 근 논문을 찾아보았다. 여전히 마땅한 주제가 떠오르진 않지만 어렴풋하게 이런 흐름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기 시작하였다. 장애인 올림픽 행사를 위한 준비도 일정을 다시 살펴보니, 그곳에 도착하여 준비를 시작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를 비우고 차분히 계획을 세우니, 나를 압도하는 것만 같은 많은 일들이 모두 해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이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필요는 없는 거다. 하나하나 할 수 있는 것들 먼저 해치워가면 되는 거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만, 그저 정신적인 압박 속에서 스스로가 못할 거라고 포기하게 되는 순간도 있을 수 있는 거다. 그럴 땐, 마음을 조금 비워봐야겠다고 한 주를 살아내며 다시금 배웠다. 욕심내지 말고, 할 수 있는 것 하나하나 헤쳐나가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모든 걸 끝마칠 수도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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