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우울, 불안장애를 가진채 살아오며 느낀 것은 나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휴식이 주어지면 불안감이 찾아온다. 마음 편히 휴식은 잘 취하지 못하는 편이다.
우울이라는 이유하에 낭비했던 시간이 제법 있었다. 후회해 봤자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에, 그 모든 시간을 지 내보냈기에 그나마 지금 정도의 나로 성장했다고 자기 암시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 때문인지, 스스로 시간을 허투루 쓴다고 생각이 들면 불안감이 찾아온다. 휴식의 중요성을 분명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내 마음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내가 마냥 열심히 잘 사는 사람인 것도 아니다. 그냥 하루하루 더 열심히 살아내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며 살아가는 거다. 무언가를 극복해 내면서 또다시 이겨내야 할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낸 거다.
약 한 달 가까이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계속해서 나름 애써봤지만 연구실 생활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전 글에서 썼던 대로 각종 이유들 때문에 내 정신 건강이 딱히 좋지 못했다. 나흘을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웅크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 외서는 생활을 정상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여전히 아침에 눈을 떠도 일어나고 싶지 않다. 알람을 추가로 맞추고 다시 눈 감기를 반복한다. 아침에 출근을 하고 세상으로 나갈 생각을 하면 조금 숨에 막혀온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면서 이 불안감들이 씻겨나가기를 바라지만 그저 몸을 움켜 안고 심호흡을 할 뿐이다. 씻을 때 불안감은 더 커져간다.
일단 우선 약을 다시 먹어야 한다는 걸 안다. 정신과 진료를 예약해 뒀지만 보름이란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주치의에게 메일을 보낸다. 전부터 진료 전 약이 떨어지면 연락해서 처방전을 받아 약을 꼭 챙겨 먹으라 했다. 갑자기 끊는 약은 위험하다고 말이다. 메일을 보내니 몇 시간 뒤에 바로 답장으로 처방전이 첨부되어 왔다. 퇴근길에 바로 약국으로 향한다. 약이 다시 생겼다. 이제 다시 꾸준히 먹어야 한다.
연구실에서의 실험은 여전히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연구는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실험실 생활에서는 원하는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나의 우울, 불안을 해소시켜 줄 다른 무언가가 없다. 너무나도 오기 싫지만 도망칠 순 없으므로 그저 힘을 내고 나와서 내 일들을 해나가야 한다.
일이 아닌 일상에서 활력을 찾아야 한다. 나는 분명히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기던 사람이었는데, 우울은 이런 모든 것들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한동안 요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라면만 잔뜩 끓여 먹으며 배만 때우는 일상이 제법 지속됐다. 라면만 먹으면 속이 좋을 리가 없다. 이런 식습관은 컨디션을 더 나쁘게 만들 뿐이다. 다시 제대로 요리하며 내 몸을 챙겨나가야 한다.
퇴근 후 바로 냉장고를 뒤져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침대에 틀어박히기 전에 사두었던 채소들이 있다. 우울함이 있을 때는 묵직한 육류들보다는 채소 위주의 식단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가지와 치즈를 꺼낸다. 가지를 얇게 잘라서 오븐에 구워내어 둥글게 잘 말리면 치즈반죽을 넣어 돌돌 말아줘서 토마토소스를 얹어 오븐에 구워낸다. 가지 롤라티니다. 좋아하는 요리다. 버섯을 꺼내 속을 파내고 빵가루와 치즈가루를 섞어 다시 속을 채워서 오븐에 또 구워낸다. 좋아하는 채식 요리들을 예쁘게 접시에 담아내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저녁을 잘 차려먹고는 책상에 앉아서 그림 그릴 준비를 한다. 다시 그림을 그리려 하니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 보통 내가 요리했던 음식들을 그림으로 그리곤 했지만 최근에 요리한 것도 별로 없었고 딱히 그리고 싶은 요리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에 그리던 강아지 시리즈가 생각났다. 구글링으로 귀여운 개 사진을 하나 저장한다. 사진을 보며 따라 그려본다. 안 그리다 다시 그리려니 뜻대로 잘 그려지진 않지만 그냥 침대에 누워 시간만 보내며 계속 잠만 자는 게 아니라 다시 취미활동을 시작하는 나 자신에 조금 대견하다. 이제 다시 책도 읽고, 운동도 하고, 베이스도 치고, 프랑스어도 공부하고- 다양한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자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