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정기적으로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고, 약을 챙겨 먹고 있다. 현재의 나는 가벼운 우울과 불안장애 정도이다. 약도 예전에 비하면 아주 많이 줄어든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일상이 힘들어지는 순간들이 다가온다. 얼마 전부터 조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버텨왔다. 그러다 지난주, 퇴근 후 연구소 사람들끼리의 맥주를 마시는 모임이 있었다. 이번에 지원을 넉넉히 받아서 예산이 많기에 먹을 것까지 공짜라고 했다. 난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능한 이곳에서 뭔가가 있으면 참석하려 애쓰는 편이다. 이 날도 일찌감치 참석한다고 메일을 보내두고, 연구실 사람 차를 얻어 타고 모임자리에 나갔다. 내가 앉은 곳 주변에 프랑스인이 많아서, 불어가 주된 언어가 되면서 나는 자연스레 소외되었다. 딱히 애써서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고, 맥주나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조금은 일찍 자리에 일어나서 집에 돌아오면서, 자기혐오에 빠졌다. 사람들 사이에 잘 어우러지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다. 이런 기분은 다음 날 금요일 출근을 하고서도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실험 결과를 메일로 받았다. 한껏 기대하고 있던 데이터였는데, 아주 실망스러웠다. 전혀 좋지 않은 결과였기에 낙담하고 기운이 빠졌다. 그때부터 두통이 생기기 시작하고 피곤했다. 저녁에 다른 모임이 있었지만, 몸이 안 좋아서 못 가겠다고 얘기를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간단하게 배만 채우고는 일찍 잠에 들었다.
토요일이 되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오후에 한글학교의 미팅 겸 사람들끼리 와인테이스팅을 하기로 했었다. 와인에 곁들일 핑거푸드를 만들 생각으로 미리 식재료도 모두 장을 바뒀었다.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침대 속에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에 빠지기만을 기다렸다. 어떻게라도 일어나서 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지만, 내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애써간다 해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엉망일 것이 분명했다. 카톡을 통해 몸이 안 좋아서 참석이 어렵다고 알린다. 일단 연락을 취했으니, 이제 주말 내내 세상과 단절되어도 된다. 그렇게 나는 침대에 누워 계속해서 잠을 자며 세상과 멀어졌다.
일요일이 되었다. 너무 배가 고팠다. 나는 지성두피라서 하루라도 머리를 안 감으면 머리에 기름이 끼기 시작한다. 이걸 방치하면 내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다. 지쳐있는 몸을 이끌고 샤워를 한다. 따뜻한 물을 틀어두고는 웅크린 채 물을 맞는다. 따뜻한 물속에 우울이 조금은 씻겨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갑자기 불안감이 몰아친다. 가슴이 답답하다. 얼른 나가야겠다. 샤워를 마치고는 머리를 말릴 힘이 없어 젖은 머리채로 다시 침대에 눕는다. 배가 고프기에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와 주스를 벌컥벌컥 마신다. 다시 잠에 든다. 한참을 자다가 눈을 뜨니 어느새 창밖은 어두워졌고 저녁이 되었다. 이제는 정말 무언가를 먹어야겠다고 느껴졌다. 한국이라면 뭔가 배달을 하겠지만, 워낙 외곽지역에 살고 있어서 아직 한 번도 배달을 시켜보지 않았다. 배달을 해도 자전거 타고 올 테니 제대로 된 배달이 될 리가 없다. 간단하게 팟타이를 만든다. 먹는다. 우울함과 별개로 맛은 느껴진다. 배를 채우고는 다시 눕는다. 어두워졌으니 다시 잠을 잔다.
월요일이다. 이제 출근을 해야 한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 일어나 본다. 방을 둘러본다. 다 마른빨래도 정리가 되지 않아 널브러져 있고, 모든 것이 엉망이다. 침대 위에 물통이며 갖가지 물건들도 널브러져 있고, 내 정신상태만큼 주변 정리가 전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출근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했지만, 가슴이 답답하며 숨쉬기가 힘들었다. 샤워를 마치고도 가슴이 뛰고 불안감에 휩싸여서 세상으로 나가기가 너무 무서웠다. 침대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서는 이불을 머리 윗까지 휙 당겨 몸을 숨긴다. 심호흡을 계속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연구실에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다.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하여 하루 휴가를 쓴다. 어떻게든 이 불안감을 다시 다잡고 내일은 출근해야지-라고 다짐하며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든다.
한참을 자고 눈을 뜬다. 배가 너무 고프다. 집에 있는 재료로 간단하게 국수를 만들어 어찌어찌 배를 채워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방 정리를 다 해야지-라고 잠시 다짐했었지만 그럴 에너지는 전혀 없다. 그저, 다시 잠에 들면서 다음 날은 어떻게든 연구실에 가야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잠에 든다.
화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정말 가야 한다. 샤워를 하면서 여전히 조금 불안감이 있지만 심호흡을 계속하며 이겨내려 애써본다. 어디선가 보았다. 뭔가 불안감이나 공황을 일으키는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피하기 시작하면 공황장애가 된다나? (확실치 않다.) 그러니 아직 심하지 않은 때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 힘을 낸다. 숨 쉬기가 답답하여 계속해서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말린다. 문을 잠그고 집을 나선다. 나흘 만에 드디어 침대를 벗어나 다시 세상밖으로 나왔다. 바깥으로 너무 나가지 않다가 나오면 잠시 멍한 기분이 든다. 내가 이 세상에 속했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뭔가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이다. 너무 오래 누워있었기에 온몸에 아직 힘이 없고 축 늘어져 있다. 어찌어찌 버텨내야 한다. 연구실에 출근했다. 성공이다. 퇴근까지 버텨내면 된다.
이렇게 오랫동안 침대 속에 숨어 있다가 다시 나온 날은 아직 온전히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아 집중력이 좋은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뭔가 큰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실수로 지금까지 애써 만들어둔 분자를 날려먹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천천히 다시 사회에 스며들도로 조금씩 다시 발동을 걸어야 한다.
다시 세상으로 나왔으니 한동안 연락을 안 했던 언니에게 연락을 한다. 조금 힘들었다고 얘기를 한다. 언니에게 얘기하다 보니 최근 한 달이 나에게 꽤나 힘든 시기였음을 알았다.
1. 우선, 나에게는 연구실에서의 성과가 꽤나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실험실에서 일이 잘 되지 않으니 일단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쌓여간다. 하는 일도 재미가 없다. 난 딱히 합성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합성한 이후, 이를 분석하고 다른 특성들에 관한 연구를 좋아하는데 이곳에서 나는 그저 합성만을 하고 있다. 그러니 일단 내 연구가 재미없다.
2. 연구 결과를 제대로 내질 못하고 있으니 계약 연장이나 다음에 대한 얘기를 보스와 나누지도 않고 있다. 그러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3. 최근에 투고했던 논문이 계속해서 리젝을 당했다. 지난 지도교수가 논문을 새로 투고하면서, 나와는 상의 없이 내용을 반으로 쪼갰다. 쪼개서는 한 가지만 가지고 투고를 했다. 내 생각으로 그거는 조금 빈약해서 안될 거라 생각했고, 역시나 지금까지 피어리뷰까지 가던 게 더 낮은 저널에서 데스크 리젝을 받았다. 조금은 짜증도 났다. 연구 총책임자의 결정이니 어느 정도 따라야겠지만, 아무런 상의도 없다는 점이 실망스럽고 화도 났다. 이렇게 투고하고 또 리젝을 당하니 시간만 계속 흘러 시간이 아깝다. 얼른 논문들을 내고 실적이 있어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찾을 수 있을 텐데, 논문들이 계속 지체되니 속이 더 타들어간다. 내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지고 있다.
4. 연구실에서도 좀 더 소외되는 기분이 든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영어로 많이 말했었다. 불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좀 있었으니까. 하지만 최근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불어를 잘하고, 에전에는 불어를 못했던 사람도 이제는 불어를 한다. 그러는 너는 왜 공부를 안 했냐고 해선 안된다. 그들과 나는 출발선상이 다르다. 같은 라틴어오리진의 언어들이라서 이들은 훨씬 쉽게 불어를 익힌다. 완전히 다른 언어로 접근하는 나와는 출발점이 다른 거다. 이렇게 불어를 하는 사람이 늘어나니 (나 빼고 전원) 사람들이 불어로 대화하기 시작한다. 원래도 조용한 편인 나고, 나 하나를 위해 영어로 해달라고 하기도 뭐해서 나는 그저 가만히 못 알아듣는 말에 둘러싸여 있는다. 이러니 모임이나 어딜 가도 내가 여기서 뭐 하나 하는 느낌이 든다. 사회적 관계가 안녕하지 못한 거다. 원래 한국에서도 나는 사람들과 그렇게 잘 어울리고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언어로 완전히 소외가 되니 한국에서와는 느낌부터 다르다. 정말로 온전히 혼자란 기분이다.
5. 조금은 나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의 부재. 같은 연구실에서 나를 잘 챙겨주던 동료 하나가 가족사정으로 고향으로 한 달 동안 돌아가야 했다. 같은 연구소에서 종종 커피타임을 갖는 한국인 친구도 3주간 한국에 잠시 들어갔다.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 모두 없었다. 나는 좀 더 혼자가 됐던 거다.
6. 그리고, 약을 잘 챙겨 먹지 않았다.
7. 운동도 전혀 하지 않아 몸이 점점 무거워지며 둔해지는 게 느껴진다.
8. 날씨가 자주 좋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구름 낀 흐린 날이 자주 있었다.
9. 다른 활동으로 활력을 채워야 하는데, 갈만한 공연도 없고, 베이스 레슨도 튜터의 사정으로 삼 주째 취소됐다. 한글학교도 방학이라 주말에도 활동이 딱히 없었다. 내 일상이 연구실뿐이었다. (그러나 연구실에서 나는 잘하지 못하고 있었다.)
10. 이제 정말 끝냈다 싶었던 실험결과가 기대에 못 미쳤다. 일주일 가까이 기대하던 결과가 엉망으로 나오지 힘이 쭉 빠져버렸다. 이게 마지막 한방이었다.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모두 작용하니, 나의 지난 한 달이 그다지 좋지 않았음을 알았다. 언니와 대화하면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괜히 내가 힘들어하던 게 아니었구나. 나의 환경이 전과 조금 달랐었구나. 그걸 조금 더 일찍 인지하고 뭔가 다른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싶었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나서 힘을 내려고 한다.
일단은 침대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전보다 빠른 회복이다. 나는 다시 나아질 수는 있을 거다. 언제고 이런 일은 반복되겠지만, 좀 더 스스로의 일상을 돌아보며 나를 챙겨야겠다. 나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