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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Dec 31. 2023

작가 놀이 2

글쓰기는 사랑


새끼가 고3이면 안 하던 기도도 더 해야 하거늘. 올핸 기도하는 게 힘들어 새벽 예배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눈만 감았다 하면 이 놈의 글쓰기가 머릿속을 다 차지해 버린다. 무엇을 쓸까로 시작해 조사는 '가'로 할지 '는'으로 할지, 문장을 앞으로 했다 뒤로 했다, 촌스럽지 않은 결론을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려 해도 이쪽에서 당기는 힘이 너무 세다. 내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아예 알람을 껐다. 잡생각 하자고 새벽부터 일어나는 건 비효율적인 것 같아 그냥 자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렇다고 내 믿음이 약해진 건 아니다. 하나님이 선하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 오랫동안 괴로웠는데 이젠 좀 수긍된다. 아픈 데가 넓고 깊어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 무슨 필요가 있어 겪게 했을까 하는 잡스러운 인생사, 내버려 두시는 내 연약함. 보니, 글 쓰려면 이런 것 다 재산이데. 그래서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역시 득이 있어야 이해가 빨라.
 



초고는 쓰레기라더니 진짜. 눈 뜨고 보기 어렵다.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것 같다. 얼른 쓰고 다듬어야 한다. 빨고 꿰매 다리면 얼추 옷 같아진다. 못 봐줄 꼴에서 점점 나아지는 걸 보면 알 수 없는 곳이 간질간질하다. 연습장에 갈기고 대충 얼개가 짜지면 노트북에 타이핑한다. 옮기면서 구성이 달라지고 더 쉽고 세련된 단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생각을 여기에 매달아 놓으면 조금이라도 문장이 나아지는 것 같다. 퇴고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해야 한다. 장소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집에서는 겁나 잘 쓴 것 같았는데 밖에서 읽어보면 완전 별로다. 교수님 말씀대로 나와 글이 좀 분리된다. 사실 나는 움직이는 게 싫다. 그래서 찾아낸 묘책이, 음악. 방에 가만히 앉아서 클래식부터 트로트까지 다양하게 틀어 놓고 글을 손본다. 나가지 않고도 분위기 전환이 빠르게 된다. 하하. 올해 가장 많이 들은 곡은 김광진의 <편지>, 조성진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달빛>이다. 책상에 앉으면 무조건 이 노래를 틀었다. 눈물을 한 국자는 흘려야 글이 나왔다. 아빠, 엄마 얘기라도 하려면 한 바가지는 쏟아야 했다. 


화요일 수업이 끝나면 둘째가 방으로 들어와 글을 주라고 한다. 지금은 게임과 웹툰에 빠져 있지만 한때는 독서광이었다. 내 글 <공간>을 읽더니 무슨 거짓말 이리 잘하냔다. 이렇게 어질러진 집이 '미니멀 라이프'냐고. 하하. 그러니까. 정직, 진실 어쩌고 하면서 쓴다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다. 공갈을 잘 치니 진짜 소설을 써야 하려나? 얼마 전에 큰아이가 티브이를 보다가 아빠랑 헤어지면 다시 결혼할 것이냐고 물었다. 화면을 쳐다보니 이상민, 탁재훈 씨가 나와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글쎄. 그건 가 봐야 알 일이고. 심장이 약간 두근댔다. 그런 일을 맞게 된다면 얼마나 이야기가 많을까! 진짜 소설책 한 권은 뚝딱이겠는데. '황선영의 이혼사, 재혼사' 유치하긴 해도 제목이 금방 나온다. 그러자면 이 사람과 영영 이별이니 코끝이 애리다. 왜 하필 글쓰기일까? 밥이 나오는가, 떡이 나오는가? 조사를 뭘로 하든 그게 뭐가 중하다고. 수많은 남자 중에 이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만치나 이해하기 어렵다. 돈이 많은가, 인물이 빼어난가? 살아 보니 별로 착하지도 않고 말이야. 뭐 상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자기야, 거 맨날 쓰는 단어만 쓰지 말고 좀 골고루 사용해 봐. 네이버 국어사전에 검색하면 유의어가 밑에 쫙 뜬다고." "아, 그래?"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낸다. "자기야, 그런데 뚱땡이 유의어에 황선영이 없어!" 멱살을 잡을까 하다가 손을 잡고 고맙다고 했다. 귀한 에피소드 만들어 줘서. 내 영감의 보고는 당신이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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